▲ 김진태 전 검찰총장

‘懲毖錄(징비록)’者何(자하) 記亂後事也(기난후사야) 其在亂前者(기재난전자) 往往亦記(왕왕역기) 所以本其始也(소이본기시야) 鳴呼(명호) 壬辰之禍慘矣(임신지화참의) 浹旬之間(협순지간) 三都失守(삼도실수) 八方瓦解(팔방와해) 乘與播越(승여파월) 其得有今日(기득유금일) 天也(천야) 亦由祖宗仁厚之澤(역유조종인후지택) 固結於民(고결어민) 而思漢之心未已(이사한지심미이) 聖上事大之誠(성상사대지성) 感動皇極(감동왕극) 而存邢之師屢出(이존형지사누출) 不然則殆矣(불연즉태의) ‘詩’ 曰 “予其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 此(차) ‘懲毖錄’ 所以作也(소이작야)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의 일도 가끔 기록한 것은 임진왜란이 그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아, 임진년의 재앙은 참담하였다. 수십 일 사이에서 세 도읍(한양·개성·평양)을 상실하였고 팔도가 와해되었으며 임금이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지금과 같이 평화를 되찾은 것은 하늘 덕분이다. 또한, 역대 임금의 어질고 두터운 덕택이 백성들에게 굳게 맺혀(백성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고, 우리 임금께서 명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황제를 감동시켜 천자국이 제후국을 돕는 군대를 여러 차례 보냈으니, 이러한 일들이 없었다면 나라는 위태하였을 것이다. ‘시경’에 ‘나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서애 (西厓)유성룡이 지은 ‘징비록’ 서문의 일부이다. 서애는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쳤으며 퇴계에게 학문을 배웠다. 20세 때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의 담력을 시험해 보고는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선조실록’ ‘졸기(卒記)’에도 ‘여러 책을 널리 읽어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번 눈을 스치면 훤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라고 쓰고 있다.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으며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병조판서, 영의정 등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전란 동안 도체찰사, 영의정으로서 사실상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과 관련하여 북인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 당하고는 낙향했다.

그 뒤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고향을 지키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서애에 대한 평가는 당대부터 극과 극을 달렸다. 당쟁과 임진왜란이라는 내우외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만큼 벼슬에 있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어느 정도 비난을 벗어나기는 힘들었겠지만 서애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퇴계의 학문을 잇는 수제자라는 칭찬과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을 구해내지 못하였다는 비판에서부터 국난극복을 위해 두보와 같이 충성을 다한 신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일본과 강화 협상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친 동탁(董卓)과 같은 간신이라는 평가까지 있었다.

그러나 서애는 임진왜란과 같은 초국가적 비상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을 책임지고 있던, 그것도 선비로서 지극히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 즉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리학자였지만 도학이나 거창한 담론보다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서애는 이순신, 권율 등의 천거에서 보듯이 선견지명으로 인재를 등용하고 자주국방을 통하여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은 서문에 쓴 대로 서애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겪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임진왜란의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쟁 이전의 대일 교섭 사항 등에 관하여도 기술해 놓고 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인터넷경북일보 속보 담당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