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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규교대 교수

공부(工夫)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입시? 취업? 직무? 교양? 수양? 소일(消日·어떤 일에 마음을 붙여 세월을 보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이유가 다 따로 있습니다. 지금은 입시준비나 취업준비가 공부의 대종(大宗·사물의 주류)입니다만 사실 공부의 원래 목적은 수양(修養)이었습니다. 당시로써는 꽤 규모가 큰 학단(學團)을 조직해 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공자가 강조했던 것도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믿음직한 인격체의 완성이었습니다. 이른바 ‘군자(君子)’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인 ‘군자’는 공자가 공부의 보편적 도달점으로 설정한 목표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성취인 대인(大人)이나 성인(聖人)과는 달리 일반적인 교육목표로서의 ‘군자’라는 개념을 강조한 것은 수양으로서의 공부를 중시한 당시의 통념(교육이념)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수양이 공부의 목적이 되면 공부는 수단적 가치를 뛰어넘는 지상의 명제가 됩니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공부 잘하는 자가 존중받는 풍토가 조성됩니다. 공자의 제자들이 일종의 공부 전문가를 자처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겠습니다(그들을 우리는 성리학자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그들 공자의 제자들은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공부 전문가, 성리학자들에게 가장 애용되던 말은 ‘곽연이대공 물래이순응(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이라는 10자였습니다. 즉 ‘(나의) 사사로운 의도적 분별을 없애고 확 트인 마음으로 대상에 따라 도리에 맞게 순응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하려면 (흔히 범하는 오류인) 편중과 편견을 없애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심(私心)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한 주관적 세계를 중시해서 외부의 사물 세계를 도외시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중정(中正)의 도’를 실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거경함양(居敬涵養·경건 속에서 주체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공부의 실천적인 덕목으로 강조됩니다. ‘김수중, ‘유가의 인간관’, ’인간이란 무엇인가’, 참조’

굳이 유학(儒學)이 아니더라도 공부(교육)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기도(企圖)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종교든 철학이든 그 근본은 항상 ‘인간(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목적으로 모든 사상과 학문은 서로 통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불완전한 그 무엇’으로 여기며 부단히 자기를 바꾸는 노력을 행해 왔습니다. 그것으로 인류의 발전을 도모해 왔습니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공부 역시 존재해 왔습니다.

4차 산업혁명기가 도래했습니다. 증기, 전기의 뜨거운 것의 시대가 가고 컴퓨터, 인공지능(로봇)의 차가운 것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와 함께 불과 몇 년 사이에, 인간이 스스로를 바꿀 충분한 시간도 없이, 노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 강요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인류의 삶이 바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오직 그 예측 불가능성만이 유일한 ‘미래의 진리’라고 앞다투어 떠듭니다. 직업의 재편에 대한 당연한 불안이 횡행합니다.

옛 성리학자들의 ‘공부의 목적과 방법’을 되새기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체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그때와 지금이 많이 비슷합니다. 그 시대의 ‘수양을 위한 공부’, ‘거경함양’이 우리 시대의 공부 목적과 방법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합니다. 인간을 대신하는 편리와 효용이 넘칠수록 ‘중정의 도’를 실현하는 인간 주체성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주체의 자립(自立)이 절실합니다. 인문학이든 예술교양(예체능)이든, 입시나 취업에서 벗어나서 중세적(中世的)인 ‘공부 권하는 사회’로 다시 돌아갈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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