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굽어보는 회화나무 후손 번영 기원하는 마음 오롯이

삼수정은 정귀령이 후손들의 번성을 여망하며 세운 정자다,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에 있는 삼수정(三樹亭)은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길고 나즈막한 언덕 끝에 있다. 정자 앞에는 600년 풍상을 이겨낸 회화나무가 언덕을 압도하고 그 앞으로 수백 년 된 소나무 세 그루가 시위하고 있다. 언덕의 주인은 정자가 분명한데 정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네 그루 소나무, ‘사천왕’을 거쳐야 한다. 마음 속 묵은 때가 많은 사람에게는 네 그루 나무가 마음 속 먼지를 털어내는 세심수(洗心樹)다.

예천에는 세 줄기의 큰 물이 있는데 태백산 자락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내려오는 금천, 태백과 봉화를 안동댐을 거쳐 예천 지보면과 풍양면으로 흘러드는 낙동강 줄기다. 그 중 삼수정 앞을 흐르는 물이 낙동강 줄기다. 삼수정에서 강을 타고 조금만 내려가면 내성천과 금천, 삼수정 앞을 지나는 낙동강 줄기가 몸을 합치는 곳이 삼강이다. 삼강나루가 있었고 삼각주막이 있는 그 삼강이다.

삼수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에코트레일 코스로 이름
삼수정의 주인은 삼수정 정귀령(鄭龜齡 생몰연대 미상)이다. 그는 본래 용궁현 우담리에서 태어났으나 1424년 지금의 충남 홍성군인 결성 현감을 지낸 뒤 이듬해 별곡에 들어와 별곡과 우망에 사는 동래정씨의 입향조가 됐다. 우망리는 ‘소가 누워서 달을 바라보는 지세’, 와우망월(臥牛望月)에서 유래했으나 뒤에 ‘근심을 잊는다’는 우망(憂忘)으로 바꾸었다.

정귀령은 이곳으로 이거하면서 북쪽으로 낙동강이 보이는 언덕에 정자를 지은 뒤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고 삼수정이라 이름했다. 자신의 아호도 그렇게 정했다. 정자는 앞면 3칸·옆면 2칸 구조이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1420년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며 1636년에 없어졌다가 다시 중건하였다.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다시 지었다. 자리를 3번 옮겼다가 1909년 원래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마루방을 중심에 배치한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정자 안에는 정원용의 ‘삼수정기’와 정지집의 ‘삼수정원운’ 등 기문과 시판이 걸려 있다.

삼수정
정귀령은 정자를 지을 당시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다. 병자호란 이후 두 그루가 죽고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 그 뒤 누군가가 소나무 세 그루를 심었는데 소나무도 수령이 200년 되는 보호수다. 옛 어른들이 집이나 정자에 나무를 심을 때는 기원하는 바가 있다. 즉, 모란은 부귀를 석류는 다산을, 소나무와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한다. 회화나무를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르는 이유다.

‘세 그루 회화나무’는 정승 벼슬을 의미한다. 중국 주나라의 정승은 ‘삼공(三公)’인데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다. 삼공을 회화나무 ‘괴槐’를 써 ‘삼괴(三槐)’라고도 했다. 주나라는 조정 앞뜰에 회화나무를 심어놓고 조정을 괴정(槐庭)’이라 불렀다. 중국 한나라 때도 황제가 거처하는 궁정에 수백년 된 회화나무를 심고 ‘괴신(槐宸)’으로 이름하고, 장안 의 번화가를 ‘괴로(槐路)’라 했다. 괴시(槐市)는 장안에 있는 9개 시장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위해 서적, 악기 등의 물건을 판매했다. 영덕 영해 괴시마을은 고려시대때 호지촌이다. 외가인 호지촌에서 태어난 고려말의 이색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가 괴시의 지형이 호지촌과 비슷한데 깜짝 놀랐다. 영해의 괴시마을은 이색이 붙인 이름이다.조선은 중국을 본 따 외교 문서를 관장 승문원을 ‘괴원(槐院)’이라 불렀다.

삼수정 아래에 세워진 사세칠현비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는 트렌드는 조선의 곳곳에 번져나갔다. 경주 강동면 다산리 ‘삼괴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이방린, 이유린, 이광린 삼형제를 추모하는 정자이다. 선조의 기상을 이어받아 후손 중에서 훌륭한 인재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5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송희규(1494~1558)는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고향집에 돌아오자 백세각을 짓고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었다. 임진왜란 때 형 최진립과 함께 의병장으로 나서 큰 공을 세운 최계종은 8명의 손자가 있었다. 손자가 태어날 때 마다 회화나무를 심었고 8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는 곳에 8형제의 우의와 후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팔우정’을 세웠다.

정귀영이 정자를 짓고 삼수정이라 이름을 붙인 까닭은 그의 후손인 정원용이 쓴 기문에 잘 나타난다. “공이 용궁현 별곡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정자의 뜰에 세 그루 나무를 심고 정자의 이름으로 했으니, 공의 뜻은 반드시 ‘진국공 왕호가 세 그루 느티나무를 심고 앞날을 기약한 것’과 같은 것은 아니나 그 자손에게 음덕이 나타나서 덕의 상징이 될 것을 실상 바라는 바가 있어서 그러했다 ” - 이조 판서 정원용이 쓴 ‘삼수정기’ 중에서-

‘진국공 왕호가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고 앞날을 기약한 것’이라고 쓴 정원용의 말은 송나라 초기 왕호의 성공사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삼괴당명’에 나오는 왕호의 성공담은 대략 이렇다. 왕호는 재상 지명 일순위에 올랐다. 그러나 워낙 강직한 발언을 쏟아내는 바람에 애석하게 탈락했다. 왕호는 자기 집 마당에 ‘삼공’을 상징하는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고 그의 아들 왕단이 진종황제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손자 왕소, 증손자 왕공까지 모두 훌륭한 인물로 기록됐다. 소동파는 이글을 통해 왕호의 음덕이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려 했다.

삼수정앞에는 본래 세그루의 회화나무가 심어졌으나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정귀령이 진국공 왕호의 성공사례를 본따 세그루 회화나무를 심은 전략은 적중했다. 정귀령의 후손들은 승승장구했다. 동래정씨 문중의 ‘동래정씨 이야기’에는 정귀령 슬하의 다섯 아들의 후손 중에서 13명이 정승을 역임했다고 한다.‘삼수정기’를 쓴 후손 정원용도 ‘우리 선조가 조선조에 공훈과 덕행이 있어 관작과 봉록을 누린 영광스런 이름으로 태상의 정에 기록됐고 맑은 조정의 묘정에 배향돼 울연히 높고 큰 집안의 실체가 됐다. 생각해보니 우리 결성공이 덕을 많이 쌓고도 보답을 얻지 못했는데 그 음덕이 고스란히 후손에게 끼쳤기 때문이다’라고 정귀령의 음덕에 감사했다. 정원용 자신은 헌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낙동강 맑고 넓어 멀리까지 뻗어 아득하네
이곳 땅의 영령이 우리 선조에게 점지하셨네
임원에서 성정을 길러 평소 행함을 편안히 하셨네
이름이 천거돼 조정에 올랐고
어느해 마악의 묘소에 들어가셨을까
높은 산 우러러 보며 모범을 생각하네
어떻게 선조의 업적을 넓힐 수 있을까
세 그루 회화나무 다시 심고 삼수당명을 걸어둘까
- 정지집의 시 ‘삼수정원운’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후손들은 정귀령의 음덕을 기려 그의 묘소가 있는 지보면 마산리 완담에 완담서원을 건축했다. 본래는 사당이었다. 1568년(선조 1)에 정귀령과 그의 두 아들 정옹, 정사를 기리기 위하여 삼수정 곁에 삼수리사를 건립했다. 임진왜란이후 완담에 완담향사로 재건하고 상덕사를 세워, 정환과 정광필을 추향하여 오위를 제향하였다. 1764년(영조 40)에 정영후와 정영방을 추향(追享)했다. 4세7현이다. 서원훼철령때 훼철되었다가 1998년에 완담서원을 완성했다. 현재 삼수정 아래에는 4세7현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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