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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48.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김씨왕가 시조···죽어서도 나라를 돌보다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등록일 2017년08월03일 20시17분  
대릉원의미추왕릉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있다.

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군병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대적할 힘이 부족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하였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야 음덕으로 도와주었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金氏)다. 미조, 미고, 미소라고도 한다.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 박씨이고, 왕비는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선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김씨 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제37대 혜공왕 14년(779년)4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안에서 우는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호소하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이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임금님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말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

이상 삼국유사의 기록을 다듬어 실었다. 미추왕은 신라의 대표적 왕가인 김씨 왕가(王家)의 사실상의 첫 번째 임금이다. 어머니는 박씨, 부인은 석씨라 박?석?김 세 가문의 연합으로 탄생한 임금임이 엿보인다. 김씨왕계의 시조답게 자손들이 다스리는 신라를 위하여 영험을 나타낸 일을 일연선사는 잘 그려내고 있다. 더구나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될 정도로 신라호국의 화신인 김유신과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며 미추왕의 애민호국정신을 돋보이게 했다. 삼산과 병칭되는 제사라 함은 대사(大祀)를 말한다. 삼산은 나력, 골화, 혈례다. 원래 국가의 정사에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가 있는데, 미추왕릉에 대한 제사는 대사였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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