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풍경은 보이지 않고 갑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아야할 때가 있다
기차가 터널을 지난다
검은 창에 떠 있는 하나의 표정을 살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묶음의 서러움과
소량의 모멸감과
발설할 수 없는 비애가 한 톤,
기차가 자꾸 터널을 지난다

이번 터널은 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저 표정을 의심한다
시간이 준 안간힘이 물거품이 된다

발설될 수 없는 고통이 한 그루,
기차는 자꾸 터널을 지난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수십 개의 내 얼굴을 바라본다
창밖엔 규정되지 않은 풍경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감상) 지금의 나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수백 개의 터널을 지나와 만들어 낸 나, 나는 그러니까 나라고 하기보다는 우리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냥꾼이었을까 독립투사였을까 매국노였을까. 지금의 나는 시인이고 선생이나 이 터널을 지나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시인 최라라)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