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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법학박사

서구의 근대에 출생한 헌법 혹은 그 계보에 속하는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방된 세계 경제 속에서 경제정책의 선택 문제는 여전히 논쟁을 일으켜 검토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사회에는 헌법상의 경제이념을 무시한 정책과 발언을 쏟아내는 정치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경제라는 용어는 한자어의 수입이다. 진나라 시대(秦代)의 글씨 포박자(抱朴子)에 등장하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왔다. 즉,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는 어원의 준말이다. 이를 번역어로 쓴 영어 economy의 어원도 그리스어의 oikonomia이다. 이 단어는 집(家)이라는 okios와 규범이라는 nomos의 합성어이다. 집이라는 공동체의 조직운영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것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유럽의 중세까지 이어져 통치나 정치로 호환되어 사용되었다. 경제라는 뜻이 물건의 생산, 유통, 소비의 전체 과정이라는 의미로 단축적으로 개념화하여 특화한 것은 17세기 절대왕정에서 국민국가가 등장하는 시대였다. 근대헌법 탄생의 시대와 공시성이 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경제는 원래 헌법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어떤 헌법을 선택할지는 본디 경제문제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헌법에서 경제 질서를 규정한다는 것은 초기 시민혁명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에서 국민의 천부인권이나 자유, 정치적 권리에 대한 규정은 있었지만, 경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경제주체로서의 기업과 기업에 고용된 근로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시장에서 경제주체를 규제할 수단이 없었던 시기에는 기업이 근로자를 착취하였고 노동시간의 제한도 없었으며 아동과 청소년들도 근로자로 고용하면서 낮은 임금을 주는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이른바 갑질의 원시적 형태였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마르크시즘과 차티즘(Chartism) 같은 다양한 사상과 정치적 운동이 등장했다. 현재 우리 정치인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쏟아내는 발언과 정책들을 보면 이러한 운동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근대사회 같다. 노예와 농노는 없어졌다고 하나 몰지각한 인사들의 행태는 시대착오적이다.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발전하던 초기부터 이미 그것은 국경을 넘어 지리적 공간적 사정을 무시한 채 지구규모에서 다른 형태로 문명화되어 전개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좌파의 이론가들은 자본은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할 필요성 때문에 전 지구 상을 누비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본은 세계시장의 상품화를 통해서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를 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고래의 전통사회와 국민경제는 파괴된다고 보았다. 대신 여러 나라 국민 간의 전면적인 상호의존 관계가 나타나면서 이미 문명화된 지역이 자의로 지구 전역에 걸쳐 공간적으로 확산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글로벌화라고 했다. 케인즈 경제학 등 이른바 수정자본주의가 주장된 후 대다수 국가에서 불공정한 사회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규제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세계인권선언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A 규약)에도 반영되어 현재는 UN에 가입한 전 세계 대다수 문명국가는 이를 위한 입법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만연한 이른바 갑(甲)질의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이론적 배경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행태를 일삼는 자들의 인간실패라 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문제는 헌법상의 경제체제나 경제이념을 무시한 퍼주기식 포퓰리즘 정책이나 좌파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공약이 우리 사회를 대립으로 몰고 있다. 갑질의 문제는 정치(권력)와 교육(인성)의 문제이지 경제(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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