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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파극(新派劇), ‘홍도야 울지마라’의 여주인공 신세를 대변하던 말이었습니다. 본디 ‘신파’라는 말이 콩쥐 팥쥐식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 현대적 상황에 충실한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해서 일말의 좋은 뜻으로 붙여진 것이었습니다만, 워낙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이야기들이 많다 보니 그 말이 그만 치정과 배신의 멜로드라마를 대표하는 명칭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가장 저급한 인간이 사랑을 미끼로 상대방에게서 금전을 갈취하는 자인데, 신파극은 보통 그런 최악의 인간과 윤리와 의리, 원칙을 중시하다 큰 손해를 입는 모범적 인간을 대비시켜 관객의 감정을 격동시킵니다. 어떻게든 관객들의 분통(憤痛)을 자극합니다. 인내가 거의 불가능해질 때쯤 되어서야 복수의 칼날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악은 징벌 되고 선은 보상을 받습니다. 사랑에 속은 여자에게는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나고, 돈에 운 여자에게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신파는 그런 가짜 욕망을 남발합니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신파극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즘 우리 현실이 신파극 느낌을 자주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에 속고, **에 우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북미갈등을 이 공식에 한 번 대입해 볼까요? 굴욕적인 ‘코리아 패싱’, ‘한반도 전장설(戰場說)’, 그런 것들이 결국 ‘동포애에 속고, 한미동맹에 우는’ 우리의 처지를 달리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요? 윤리와 의리를 중시하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고작 강한 배신감과 재정적인 손실뿐이라면 결국 그게 신파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으로 눈길을 한 번 돌려보겠습니다. 수능 절대평가 도입 문제가 말이 많습니다. 부분이든 전체든, 수능에 절대평가가 도입되면 수능은 어쩔 수 없이 허울뿐인 시험이 됩니다. 선발고사가 아니라 자격고사가 됩니다. 설혹 ‘일부 도입’으로 결정되어도 대학 당국에서는 나머지 상대평가 부분을 절대로 중용(重用)할 수가 없습니다. 공평성에도 문제가 있고, 재정 지원 상의 엄청난 불이익도 감수해야 합니다. 차라리 아예 포기하거나(깜깜이 학종입시) 다른 수단(본고사)을 강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능에 속고, 학종 (학생부종합전형)에 우는’ 수많은 선의의 피해자들이 생길 것이 뻔합니다. 이 또한 신파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밀리도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설득력이 없어요. 문장이 엉망이고 조리도 없어요. 머리가 돌았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대통령의 연설은 음색인식불능증(音色認識不能症) 환자인 그녀를 감동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이것이야말로 대통령 연설의 패러독스였다. 우리 정상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 속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잘 속아 넘어간다. 음색을 속이고 교묘한 말솜씨를 발휘할 때 뇌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빼고 전부 다 속아 넘어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올리버 색스, 조석현 역,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스스로 ‘음색인식불능증’을 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안의 ‘속고 싶은 마음’을 철저히 외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문장이 엉망이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헛말에 감동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남을 속일 마음이 없다면, 신파극에서처럼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신세가 되기 싫다면, 그 가짜 욕망에게 곳간 열쇠를 통째로 넘기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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