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봉성면이 고향인 박희태(당시 25)씨는 어린 딸과 부인을 남겨 둔 채 일본 남단 오키나와로 끌려갔다. 오키나와는 일제 강점기 대구·경북민이 가장 많이 징집돼 간 전쟁지역이다. 모두 1천505명이나 된다. 박희태 씨도 다른 7명의 이웃과 함께 징집됐다.

일제 말기 오키나와에는 계속되는 전투로 식량이 부족해 영양실조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는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한 민가의 고구마를 훔쳐 먹기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바로 들통이 났다.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고향에서 같이 온 3명의 조선인과 함께 그의 목을 벴다. 한창 젊은 나이에 조국에 남겨 둔 어린 딸과 아내, 부모를 뒤로 한 채 타향의 전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 비통한 소식은 운 좋게 살아 돌아온 동료들에 의해 고향의 가족에게 전해졌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내와 딸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가난에 시달리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다행히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라는 일본 시민단체와 오키나와 현이 이 같은 박희태 씨 유가족의 진정서를 받아들여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세워져 있는 위령비 ‘평화의 초석’에 ‘박희태’라는 이름을 새겨넣었다. 뒤늦게나마 공원을 찾는 이들로부터 위령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초석에는 24만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한반도 출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민단체와 유족들의 온갖 노력으로 지난 6월 오키나와 현이 박씨와 권운선씨 등 한반도 출신자 15명의 이름을 더 새겨넣었다. 이로써 비석에 새겨진 한반도 출신자 수는 462명이 됐다. 하지만 당시 8천 명 가량의 젊은이들이 끌려가 숨진 것으로 알려진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3~6월 미군과 제국주의 일본군의 격전이 펼쳐졌다. 전쟁이 격화하면서 오키나와에서 한반도 출신자 상당수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숨져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박희태 씨와 같은 기구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행정자치부 자료를 보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가 대구 5천452명, 경북 2만3천630명 등 대구·경북에서만 모두 2만9천82명이나 된다. 광복 72주년, 선열들의 희생과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동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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