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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물] 35. 성주군 성주읍

성산산성·고분군…많은 문화유적 분포 '성주의 자존심'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등록일 2017년08월15일 19시16분  

성주읍.JPG
성주읍은 성주군의 중앙에 위치한 행정·교육·상업의 중심지로서 지리적으로는 읍기(邑基)의 진산(鎭山)인 인현산(印懸山, 185m)을 북으로 하고 안산(案山)인 성산(星山, 389m)을 남쪽에 뒀으며, 서북쪽으로부터 유입된 이천(伊川)이 남쪽으로 성주읍성의 남정(南亭, 지금 성주여중고 자리) 아래로 감아 돌아 동류해 백천(白川)에 합류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서쪽으로는 멀리 가야산과 고산준령으로 둘러 쌓인 요지에 자리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36.34㎢이며 행정구역은 법정 10개리, 행정 35개리로 가구·인구는 2017년 6월말 기준 6천208세대에 인구는 1만4천60명이다. 성주읍의 인구는 1966년도에 3천500세대에 1만9천887명으로 최고조에 달했으나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로 이농 현상이 가속화돼 점차 감소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주일반산업단지 전경
△역사적 변천
성주읍은 읍의 안산(案山)인 성산에 국가정 문화재인 성산동고분군(사적 제86호)이 있어 예로부터 성산가야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성산가야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五伽倻)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성산가야는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비화가야(창녕), 소가야(고성)와 함께 가야를 구성하는 한 국가로서 성주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언급돼 있다. 성산가야는 6세기 중엽인 562년(신라 진흥왕 23)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되며, 685년(신문왕 5) 9주 5소경을 근간으로 한 신라의 행정구역 개편 시에는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 속한 일리군(一利郡)의 속현인 본피현(本彼縣)이 됐다. 757년에는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면서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됐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940년(고려 태조 23)에 전국적으로 주·부·군·현의 명칭과 행정조직체계를 구조적으로 개편했을 때,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했다.

또한 981년(경종 6)에는 광평군(廣平郡), 995년(성종 14)에는 대주도호부(岱州都護府)가 설치됐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복호 되고 1295년(충렬왕 21)에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1308년(충렬왕 34)에는 성주목으로 개편됐다가 고려 말인 1310년(충선왕 2) 경산부로 환원됐다.

성주읍 전경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조에 대사 성주목이 됐으며, 1615년(광해군 7)에 신안현으로 강등됐다가 1623년(인조 1)에 다시 성주목으로 복구됐다.

이후 1631년(인조 9)에 성산현으로, 1640년(인조 18)에 목으로, 1644년(인조 22)에 현으로, 1653년(효종 4)에 성주목으로, 1736년(영조 12)에 성산현으로, 1745년(영조 21)에 성주목으로 승격되는 등 행정체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5월의 관제개혁 때에는 용, 남산, 본아, 북산의 4개 리가 면이 됐는데, 용산면은 지금의 경산, 삼산, 성산, 예산리의 일부지역을, 남산면은 경산, 성산, 대황, 대흥리 일부와 대가면 옥성리를 포함했으며, 본아면은 백전, 용산리와 대흥리 일부, 벽진면 가암리 일부를, 또한 북산면은 예산, 금산과 학산, 삼산리의 일부를 구역으로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 4개 면이 통합되어 성주면이 되고 10개의 법정동으로 정비됐으며, 1979년에 이르러 면에서 읍으로 승격됐다.

△문화유적
성주읍은 성산가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주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이어온 관계로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성주향교(보물 1575호)를 비롯해 성산가야 수장층의 분묘로 추정되는 성산동고분군(사적 86호),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향토성과 역사성을 가진 숲으로 주민들의 산책과 생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성밖숲(천연기념물 403호) 등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비롯해 고려 초기에 조성된 동방사지칠층석탑(유형문화재 60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절로서 순국한 제말(諸沫, 1543~1592)과 그 조카 제홍록(諸弘祿, 1558~1597)의 전공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인 쌍충사적비(유형문화재 61호), 조선시대 성주목객사건물의 일부인 성산관(유형문화재 143호), 2층으로 건립된 근대 한옥인 만산댁(유형문화재 389호)·배리댁(문화재자료 514호), 조선시대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이 회합하던 장소인 연계당(문화재자료 115호) 등의 도지정문화재가 읍내에 산재해 있다.

성주읍성은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서 처음 토성으로 축성됐다가 1520년(중종 15) 10월에 석축으로 크게 개축했는데, 이때의 규모가 둘레 2.046㎞, 높이 2.72m였다. 1591년(선조 24) 다시 개축했는데,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그 안에 7곳의 샘과 4곳의 못이 있었으나 없어진 지 오래됐다. 성곽도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사고는 역대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1439년(세종 21) 7월 역사를 담당하던 기관인 춘추관에서 올린 외사고 확충계획에 따라 성주에 설치된 바 있다. 성주사고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세 차례에 걸친 성주성 전투 때 불타버렸으며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성산동고분군 전경
△성주읍이 배출한 인물
성주읍은 성주의 중심지로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성주읍이 배출한 대표적 인물은 1983년 10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해 17박18일간의 서남아시아·태평양 6개국 순방길에 나섰다가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시내 아웅산묘소에서 북한의 공작원이 장치한 폭발물에 의해 순국한 서석준 전 부총리가 있다. 고인은 성주읍에서 태어나 성주농고 재학 중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했으며, 대학 재학중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후 경제 관료로서 큰 업적을 남긴 바 있다.

김동태 전 농림부 장관은 성주읍에서 태어나 성주농고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 후 1971년 청와대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농림부로 옮겨 주요보직을 두루 거치고 농촌진흥청장과 농림부 차관, 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건국대 석좌교수로 있다.

종합식품기업인 사조그룹의 주진우 회장은 경제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주읍 출신 인물이다. 29세에 가업을 이어 수산기업으로 시작한 사조그룹을 현재의 위치에 까지 끌어 올렸으며,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성환 전 의원은 정계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성주읍 출신 인물이다. 1986년 10월 14일 제12대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격 구속돼 국회의원이 회기 중 원내발언으로 구속된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의 주인공이었다.

김석규 전 주일대사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경야독해 외교관의 꿈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성주농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김 전 대사는 외교부 미주국장, 외교안보연구원장, 주파라과이, 주이탈리아, 주러시아 대사를 거쳐 2000년 주일본대사를 역임했다.

김인환 전 계명대 교수는 제1대 환경부 차관을 역임한 환경전문가로 환경청 발족 때부터 몸담아 온 환경행정의 산증인이다.

이 밖에 백운현 전 국민권익위원회부위원장, 안태주 전 용산구의회의장, 채한수 전 칠곡경찰서장 등이 정·관계에서 활동한 성주읍 출신이며, 김재현 전 대한유도회장, 도무회 전 대제종합건설회장, 배수곤 전 은행감독원장(고인), 백수현 전 한양대공대학장, 백숙기 동부CNI컨설팅부문사장, 이종수 전 한성대대학원장, 이창규 DK메디칼시스템회장, 제만호 H&T 대표이사, 최도열 숭실대 교수 등도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주읍 출신 인물들이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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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항 기자

    • 권오항 기자
  • 고령, 성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