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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81. 안동 명옥대

푸른 바위 맑은 물 그대로인데…함께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나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8월17일 21시09분  
명옥대는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천등산의 끝에 살포시 내려 앉은 학 같다..JPG
▲ 명옥대는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천등산의 끝에 살포시 내려 앉은 학 같다.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天燈山, 576m)이다. 이 산의 한 바위굴에서 의상대사의 제자능인대사가 득도했다. 능인대사가 바위굴에서 수도할 때 하늘에서 천녀가 내려와 불을 밝히며 득도를 도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산이름을 천등산이라고 했다. 대망산이라고도 하고 개목사(開目寺)가 있으므로 개목산이라고도 한다.개목사의 본래 이름은 흥국사였다. 조선시대의 재상이었던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왔다. 안동의 지세가 눈병환자가 많을 형상이었다. 절 이름을 개목사로 바꾸고 나니 맹인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잘나가던 시절에는 99칸의 큰절이었다고 한다.

명옥대편액. 육사형의 시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에서 따왔다.
천등산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봉정사(鳳停寺)다. 672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목조건물의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된 목조건물이 많다. 특히 극락전은 고려시대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인정받는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 때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 명옥대가 있는 곳이 서후면 태장리 봉정사 입구에 있다. 봉정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를 지나면 얼마지 않아 왼쪽 계곡 건너편에 있다.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산의 끝자락에 살며시 내려 앉은 한 마리 학처럼 기품있게 자리잡고 있다. 속세에서 비켜서서 은인자중하는 선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명옥대가 있는 태장리는 공민왕 시절 궁중에서 이곳에 태를 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태무지라고 불렀다.

퇴계이황이 만년에 강학을 했던 명옥대.JPG
▲ 퇴계 이황이 만년에 강학을 했던 명옥대.
명옥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친구들과 놀던 곳이다. 이황은 16살 때 봉정사에서 사촌인 이수령, 권민의, 강한과 함께 3개월 정도 독서를 했다고 한다. 숙부이며 스승인 이우(李瑀)는 이황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곳을 여기저기 정해주었는데 봉정사에서의 독서도 이우가 주선해줬다. 봉정사에서 공부도 하고 추억도 쌓았다.

법당 서쪽에 누각하나 가로질러 있는데 梵宮西畔一樓橫
신라시대때 창건됐으니 몇 번이나 서고 무너지고 했을 고 創自新羅幾毁成
하늘에서 등불이 내려와 부처가 됐다는 말 참으로 허황하구나 佛降天燈眞是幻
왕기가 흥해 태를 묻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구나 胎興王氣定非情
산은 비를 머금어 그림자색 더 짙어지고 山含欲雨濃陰色
향기로운 봄을 보내는 새는 지극히 우는구나 鳥送芳春款喚聲
어릴 때 깃들던 곳 흘러와 보니 漂到弱齡栖息處
흰머리가 되고 보니 헛된 이름에 안주하던 때가 슬퍼진다 白頭堪歎坐虛名
- 이황의 시 ‘봉정사서루’

정자옆에 있는 폭포.JPG
▲ 정자 옆에 있는 폭포.
명옥대의 테마는 바위와 바위를 굴러 떨어지는 물이다.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바위는 평평하여 수십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바위가 끊기면서 폭포가 된다. 물이 떨어지는 바위를 ‘낙수대(落水臺)라고 이름했다. 단조로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황은 중국 서진(西晋)의 시인 육기(陸機)가 쓴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시구에서 글을 따 명옥대로 바꿨다. 포항의 분옥정(噴玉亭)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옥구슬이 분수처럼 튀어오른다는 뜻이다. 회화적이다. 명옥대는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옥이 우는 소리로 표현했다. 음악적이다. 귀가 시원하다. 봉정사에서 독서를 했던 이황은 50년이 지난 1566년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 후학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1665년(현종 6) 건립했다. 김시침이 발의를 하고 일은 봉정사 보명스님이 맡아 추진했다. 그 당시 협조를 호소했던 ‘봉정사 명옥대창건시통문’이 남아 있다.

명옥대 사적비는 퇴계이황이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JPG
▲ 명옥대 사적비는 퇴계 이황이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대의 명필이며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에게 기문을 써달고 부탁하는 글, ‘여허미수목서구명옥대기 與許眉叟穆書求鳴玉臺記’다. 명옥대의 경치를 직접 보지 못한 허목이 기문을 본 듯이 제대로 쓸 수 있게 정자의 주변 경관을 자세히 기록했다. “신라 고찰인 봉정사(鳳停寺) 입구에 샘물과 돌이 매우 기이하니, 안장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솟아올라 절벽이 되었고, 그 위는 평평하여 십여 명이 앉을 수 있습니다. 절벽의 끝에는 다시 점점 낮아져 지면으로 펼쳐지다 계곡물에 끊겼습니다. 그 모양은 갑자기 일어섰다 갑자기 엎드렸고, 혹은 가로 혹은 세로로 굴곡져 골짜기가 되어 마치 계곡물이 움푹 파 놓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 색은 희고 맑아 옥수(玉水)가 흘러든 것 같고, 가운데는 휘감기고 소용돌이치며 콸콸 소리 내고 떨어져 몇 길의 폭포가 되니 가장 기이한 경치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들이 전국의 명승을 직접 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자 화원을 시켜 절경지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보고 시를 써기도 했는데 숙종이나 정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멀리 떨어져 정자의 경관을 직접 볼 수 없는 이의 기문을 부탁할 때 이렇게 기초자료를 보냈다는 흥미롭다.
창암정사 편액. 퇴계의 시 ‘창암’에서 따왔다.
정자에는 명옥대 편액 외에 ‘창암정사(倉巖精舍)라는 편액도 나란히 걸려 있는데 퇴계 시에 나오는 ’창암‘을 딴 것이다. 처음에는 방 1칸, 누각 2칸의 3칸 건물이었다가 이 건물 뒤에 승려들이 사용하는 승사 3칸을 더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의 정자는 1920년께 개축됐다. 정면 2칸 측면 2칸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안에는 이 정자의 이름이 본래 낙수대였으나 육사형의 시를 따 명옥대로 개칭했다는 내용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안에서 보면 사방이 트여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다. 동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바위에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진다. 물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맑아진다. 맞은편 바위에 큰 글씨로 ‘명옥대(鳴玉臺)’라 새기고 4행의 해서체 문장을 덧붙였다.

봉정사를 지나온 계곡은 명옥대 앞에서 급하게 내려와 작은 폭포를 이룬다..JPG
▲ 봉정사를 지나온 계곡은 명옥대 앞에서 급하게 내려와 작은 폭포를 이룬다.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此地經遊五十年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韶顔春醉百花前
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只今攜手人何處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依舊蒼巖白水懸
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 白水蒼巖境益奇
완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 無人來賞澗林悲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他年好事如相問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주오 爲報溪翁坐詠時
- 이황의 시 ‘명옥대’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이황은 50년이 지나 이곳을 찾아 시를 썼다. 그의 나이 66살 때다. 죽기 3년전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돼 어린시절 놀던 곳을 돌아보니 꽃 같던 젊은 시절 함께 하던 친구들 생각이 절절하다. 그 바위 맑은 물은 그대로 인데 같이 놀던 친구들은 모두 죽고 없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 나이 들어 들어다보는 계곡의 경치는 한결 더 아름다운데 같이 놀던 친구들 세상에 없으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친구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자신이라도 시 한수 남기고 떠나겠다는 절박함이 보인다.

만고의 운문 중에 제일로 기이하니 萬古雲門第一奇
폭포가 오열하여 슬픔을 머금은 듯하네 飛泉嗚咽似含悲
퇴계가 떠난 뒤에 명옥대만 남았으니 退翁去後空鳴玉
어느 때에 지음을 다시 만나 찾아갈까 再遇知音問幾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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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문의 시 '낙수대'

명옥대는 그후 오랫동안 조선 선비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됐다. 이황의 시를 차운하거나 제영시를 남겼고 이황을 그리워했다. 권병과 권호문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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