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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한 변호사

글을 쓰는 일은 전문가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도 통화보다는 문자나 카톡으로 하는 게 우리 모습이다. 우리가 확실히 예전보다 책을 잘 읽지는 않게 된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거나 매일매일 글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우린 모두 글 쓰는 사람들, 호모 스크리벤스(Homo Scribens)다.

그런데, 글을 쓰는 것은 실은 두려운 일이다. 지금은 대다수로부터 옳다는 평가를 받는 글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거꾸로 다수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글을 쓴다. 또, 미국 작가 폴 오스터(Paul Auster)가 말한 대로 ‘쓰인 글을 반드시 읽힌다’. 쓴 후 바로 지금 읽히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읽힌다. 필자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한 글을 막상 그 당사자가 당장 읽지 않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그의 친구나 가족이 반드시 그 글을 읽을 것이다. 혹여 그가 필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 누군가가 언젠가 그 글을 읽을 수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을 두고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비판한 판사는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최근 공판 여검사와의 회식자리에서 여검사를 성희롱하였다는 의혹으로 받았던 판사는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물론 오늘은 대법원 징계의 공정성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지적들도 당연히 영원히 글 속에 남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분명히 적어 놓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원세훈 1심 판결문과 그 판결문을 비판한 글, 두 글도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별지까지 세면 모두 204쪽에 달하는 1심 판결문에는 부장판사만이 아니라 배석 판사들의 이름까지 영원히 남아 있다. 지록위마의 판결이라는 비판을 올린 부장판사의 이름은 지금도 쉽게 검색 가능하다.

인류에게 남겨진 최초의 이야기는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와 ‘오딧세이아(Odysseia)’라고 한다. 신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일리아스’, 신과 다른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운명을 가진 인간을 본격적으로 노래한 ‘오딧세이아’로부터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대통령을 맞은 우리는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들의 새로운 ‘오딧세이아’가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취임사, 5·18기념사, 8·15 경축사를 통하여 그 화두를 던져 놓고 있다. 우리 이야기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줄 이야기들을 우리는 고대하고 있다. 그것은 올해 안에 모두 선고될 것으로 예상되는 국정 농단 사건들에 대한 1심 판결문들일 수도 있다. 더 이상 기레기가 되기를 거부하는 용기 있는 기자의 폭로 기사들일 수도 있다. 불의(不義)임을 알면서도 지시받은 대로만 할 뿐이라며, 이른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실천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수한 부역자 중 다수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들일 수도 있다. 벅찬 감격을 준비하여 둔 채로 희망의 글들을 기다린다. 어여쁜 우리 님 기다리듯 기다린다.

닭들이 흙 목욕으로 진드기를 퇴치하도록 하는 자연농법을 실시하던 지역의 산란계 농장에서 출하된 계란에서도 DDT가 검출되었다는 소식이다. 20년도 이전에 복숭아밭에 뿌렸을 것으로 보이는 DDT 농약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몹쓸 살충제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적폐들도 모두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날들이 하루속히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후 완전히 새로운 세상, 우리에게는 오롯이 희망의 글들만 넘쳐 나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은 남는다. 좋은 글은 결국 더 오래 남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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