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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사람살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빛나는 것들’입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 세대를 넘어 감동을 전하는 명작들,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당대의 스타들, 그것 이외에도 우리 각자가 지닌 ‘내 마음의 보석 상자’들, 그것들이 있어서 우리 인생이 거친 사막(沙漠) 신세를 면합니다. 저도 한때는 소설가였기에 그것들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빛나는 것들’에 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관심하는 분야가 문학예술이니 그쪽에서 설명을 구하겠습니다. ‘빛나는 것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주로 명사와 형용사가 사용됩니다. 이를테면 “소신에겐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문장에서의 ‘열두 척의 배’가 한 예가 됩니다. 특별한 명사 무리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같은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라도 “전군(全軍) 출진하라!”는 좀 다릅니다. 여기서는 동사가 중심입니다. 가끔은 동사도 빛나는 것들을 형용할 수 있습니다. “전군 출진하라!”의 비장미(悲壯美)가 그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사즉생(死卽生), 죽기를 각오하고 솔선해서 앞장을 서는 장수된 자의 비장한 심정이 확연히 전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빛나는 것들을 찾아내는 주역은 역시 명사와 형용사입니다. “이런 정신적 수준에서 여러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의식(意識) 또는 자각(自覺)의 언어이다. 그것은 대체로 명사와 형용사의 언어이다. 여러분은 사물들에 대한 명칭을 가져야 하고, 사물들이 어떻게 보였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젖은’ 혹은 ‘초록의’ 혹은 ‘아름다운’과 같은 성질을 나타내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는 명상적 혹은 사색적인 마음의 자세로, 비록 그것들이 오래 지속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자세에서 예술과 과학은 시작된다.”(노드럽 프라이, 이상우 역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 원형비평의 창시자, 거시적 문예비평의 개척자인 프라이는 예술과 과학의 핵심 동력을 ‘탐구와 발견의 자세’에서 찾습니다. 물론 자신을 객관화하는 사색과 명상이 전제가 됩니다. 동일한 대상을 마주하더라도 누가 더 명상적이고 사색적인가에 따라서 발견해 내는 것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귀한 것, 빛나는 것, 젖어있는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프라이는 강조합니다.

프라이적 관점에서, 요즘 세간의 물정을 명사와 형용사, 그리고 동사라는 개념의 촉수로 촉진(觸診·손으로 만져서 진찰함)해 보면 어떨까요? 가장 먼저 잡히는 게 조급함입니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명사와 형용사보다는 동사가 항상 앞섭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그런 증세가 완연합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신경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경증이라는 것은 우리 상상체계에 모종의 버그(바이러스)가 들어서 어떤 특정 부분이 심하게 왜곡, 교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계든 인간이든, 인풋과 아웃풋의 체계가 자율적으로 실행되는 것에 버그가 끼면 필요 이상의 과부하가 생겨 본체가 망가지기도 하고, 꼭 필요한데도 뜬금없이 삭제되어 심각한 불통 관계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속(速, 俗)되게 몰아붙닙니다. 대체로 시계의 초침과 같은 템포로 모든 것을 재촉합니다. 보통은 강박과 결벽이 동반합니다. 한편으론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도 강하게 집착합니다. 어떤 일에서든 당장 그 자리에서 “꼭 필요했다, 참 잘했다”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너무 애쓰지 마라”, 만약 내 아이가 그렇다면 그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무엇에 쫓기듯이 살지 말고 가끔 빛나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권하겠습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본디 귀한 것들, 운명적으로 사시사철 늘 젖어 있는 것들을 자주 보라고 하겠습니다. 그럴 때, 언젠가 너도 빛나는 것이 될 수 있다고요. 이 애비는 비록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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