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산문작품의 주된 산실이 강진일 뿐 그의 탁월한 시(詩)의 산실은 포항의 장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산 스스로 두 아들에게 준 글 ‘시이자가계(示二子家誡)’에서 “나는 천성이 시율(詩律)을 좋아하지 않는다. 1801년 이전에는 시를 지었어도 모두 다 형편에 따라 할 수 없이 지은 것들이며, 간혹 저절로 흥이 나면 한가로이 읊기도 했으나 이 모두가 전혀 마음 쓰거나 힘을 기울인 일이 아니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801년’이라는 연도다. 다산이 첫 유배지 장기로 유배된 해로 그 해에 엄청난 양의 시를 창작해 냈다.

우수한 다산 시의 많은 부분을 이곳 장기에서 썼다. 유배 오기 전까지는 그저 선대 풍류의 시를 닮게 지었을 뿐 진정한 그의 뜻이 담긴 작품은 아니었다는 것이 다산의 자평이다.

2월 17일 유배 길에 오른 다산은 3월 9일에야 장기에 도착한다. 다산은 장기현 마산리(현재 마현리) 냇가의 성선봉(成善封) 집에 작은 방을 거처로 정하고 장기의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10월 20일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될 때까지 220여 일간의 장기 유배생활에서 오직 시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수, ‘고시’ 27수 등 130여 편의 시가와 효종이 죽은 해에 효종의 복상(服喪)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의 시비를 가린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 아들에게 보낸 3통의 편지글 등을 남겨 풍요로운 다산문학에 향기를 더했다.

다산이 포항 장기로 유배 온 지 200여 년이 지났지만 정신을 기리는 일이 좀 소홀한 듯하다. 장기읍성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포항시가 2020년까지 성곽 복원과 성 안의 사유지 매입 등을 끝내고 포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성곽의 복원과 함께 다산정신을 기리는 사업도 함께 하면 장기읍성이 전국적 명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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