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명예 집착 버리니 산과 물이 한발짝 더 내게 다가오네

탁청정은 오천 냇가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도 수몰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서 미끄러졌다. 문사였지만 활쏘기와 무예도 뛰어났다. 길을 바꿔 무과에도 응시했지만 낙방의 쓴잔을 마셨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 사족이었다. 친형인 김연(金緣·1487~1544)은 식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과 사헌부 등 중앙요직을 거쳐 강원관찰사, 경주 부윤 등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며 이름을 날렸다.

지독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그는 한순간 벼슬에 대한 집착을 미련 없이 던졌다. 매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사는 것이 어떤가. 꼭 세상의 명예를 뒤쫓을 필요가 있을까.”(퇴계선생문집 성균관생원 김공 묘지명 병서) 써주면 나아가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엎드려 음풍농월하며 일신을 돌보며 자신만의 삶을 즐길 일이다.

마음을 비운 그는 부모를 봉양하며 자신의 길을 열어나갔다. 풍광이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지어 인근 선비들과 풍류를 논하고 안동을 지나는 선비들을 초청해 음식을 접대하며 우의를 다졌다. 퇴계 이황도 농암 이현보도 그가 만든 레시피를 좋아했다. 음식이 쌓이고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도 축적됐다. 그렇게 해서 선비가 쓴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이 탄생했다. ‘수운’은 ‘주역’의 다섯 번째 괘인 ‘수는 음식의 도이다’라는 수괘에서 따왔다. ‘격조를 지닌 음식 문화’를 말한다. 잡방은 ‘여러 가지 방법’이다.

가장 오래된 요리서는 ‘산가요록(山家要錄)’이지만 저자가 밝혀진 요리서로는 수운잡방이 가장 오래됐다. 1권2책의 한문 필사본이다. 김유가 지은 상편과 손자 계암 김령이 지은 하편으로 구성됐다. 술빚기 62항목, 장류 10항목, 침채 및 저류 15항목, 식초류 6항목, 채소 저장법 2항목이다. ‘수운잡방’은 김유(金綏·1491∼1555)의 낙방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역작이다. 마음자리를 바꾼 자리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담은 것이다. 요리책 쓰는 선비로서 조선 인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목백일홍와 향나무 사이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탁청정.
산이 두르고 물이 돌아 정자를 감쌌는데
정자의 주인은 냉정한 서생이 아니네.
팔백의 진수성찬 하인시켜 장만하고
천금의 아름다운 술 투할하고 마시네
나무 찍는 기이한 꾀를 남들은 모르니
버들잎 뚫는 오묘한 기술을 누가 다투랴
탁청정은 참으로 풍류가 있어
대 발과 매화 향기에 맑은 운치 넘치네
허허, 이 세상에 하나의 초정
두릉의 시구를 나는 평생 음미했네
심어 놓은 호수의 귤은 응당 자랄 테고
남겨 놓은 주머니의 돈은 마음대로 꺼내네
꿈속에선 늘 계우2와의 약속을 찾았고
자리에선 야인의 다툼을 보게 되네
어찌하면 맑은 샘 옆에 집을 짓고서
그대만이 맑은 경치를 독점치 않게 할까


-퇴계 이황의 시 ‘김유지의 탁청정에 부치다(寄題金綏之濯淸亭)’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번역)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이다.탁청정 앞 연못에 연잎이 가득하다.
탁청정은 안동시 와룡면 ‘광산김씨 오천유적지’인 오천군자마을에 있다. ‘수운잡방’의 저자 김유가 1541년(조선 중종 36)에 세운 정자다. 오천군자마을은 본래 현재의 자리에서 2km 떨어진 오천 냇가에 있었으나 안동댐에 수몰되면서 197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오천은 물속에 있는 돌이 멀리서 볼 때 검게 보였다고 한다. 까마귀 ‘오(烏)’자를 써 오천이라고 한다. ‘까마귀 오’자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외’자가 되는데 우리말로 ‘외내’라고 한다. 수몰되기 전에는 마을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었다. 군자마을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 ~ 1620년)가 안동대도호부사로 있을 때 오천을 방문한 뒤 “한집안 식구로서도 다 착하기 어려운 법인데 오천 주민들 모두가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감탄한 데서 이름을 얻었다.

탁청정도 이때 이건됐다. 북쪽 정면 2칸, 측면 1칸은 방이다. 영남지방의 개인 정각으로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탁청정 정명은 굴원의 ‘어부사’에서 따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세상이 도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맑으면 벼슬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등지고 은일의 삶을 즐기겠다는 뜻이다. 김유의 경우 되지도 않는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조선의 명유들과 음식과 술, 시를 나누며 한세상 시름을 잊고 살겠다는 의미로 붙인 듯하다. 편액 글씨는 정자 편액으로는 드물게 크다. 한석봉이 썼다.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고 있다.
탁청정이 있는 안동 오천군자마을.
탁청정 안에서 보는 오천군자마을.
탁청정 편액글씨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편액글씨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한석봉이 정자를 찾아왔다. 빈 편액을 벽에 걸어두라고 했다. 먹을 적신 뒤 사다리를 올라 ‘탁(濯)’자를 쓰기 시작했다. 어떤 위치에서든 좋을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집안 어른이 심사가 뒤틀렸던 모양이다. 편액 글씨를 벽에 걸어놓고 쓰는 자신감이 시골선비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사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탁’자 중 삼수변의 두 번째 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석봉을 떨어지지 않았다. 워낙 강한 힘으로 점을 찍었으므로 점을 찍는 힘으로 버티었던 것이다. 붓으로 벽에 매달린 형국이다. ‘탁’자의 삼수변 둘째 점이 특히 굵고 힘이 있다는데 이런 연유다.

김유는 이곳에서 이황 이현보 정구 류성룡 김성일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그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술과 음식을 즐겼다. 특히 이황과 이현보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자신의 아들 4명을 모두 이황의 문하에서 가르쳤다. 이황에게서 배운 장남 김부인은 무과에 급제해 경상도좌병사를 지냈다. 김유의 장녀는 이황의 5촌 조카와 결혼했고 김유의 생질녀 금씨는 이황의 장남 이준과 결혼했다. 이준은 10년 동안 김유가 있는 오천리 처가에서 살았는데 이 때문에 이황은 탁청정을 자주 방문했다. 김유는 이황보다 10살이 많았지만 돈독한 정을 이어갔다. 이현보와는 사돈을 맺었다. 장남 김부인이 이현보의 딸 영천이씨를 아내로 맞은 것이다. 김유에게는 두 사람의 롤모델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그의 형 김연이었고 한 사람은 이현보였다. 김연은 벼슬길에 나아가 이름을 떨쳤고 이현보는 벼슬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복을 누리고 있었다. 이현보에게 시를 청했다.
탁청정 정자 이름은 굴원의 시 ‘어부사’에서 따왔다.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섬돌 바로 아래는 못이고 못 위는 정자인데
난간에 봄이 오니 시원도 하다
둘러친 개울 골짜기 맞대어 앞산을 끼고
처마는 넓고 하늘은 낮아 북두성이 기울었다
마루에 가득한 술 손님 취하게 하고
정자 켵에 활 과녁을 설치하여 이웃을 모아 겨루었다
다행히 내가 늙어 물러나 한가로우니
언제든 부르면 가서 그 신선한 맛을 나눌까 하네

- 이현보의 시 ‘탁청정에 차운함’

김유는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벼슬을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즐겼고 역사에 길이 남을 요리서를 남겼다. 그토록 바라던 과거에 실패하면서 절벽 위에 섰지만 실패의 끝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김유가 죽자 이황이 묘지명을 썼다.

“아아 공이 낳을 때부터 이미 시와 서를 익혔고 또한 육도삼략을 배웠도다. 문에는 소과에 합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격하였으나 무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네. 시골에서 그대로 늙으니 남들이 애석하게 여겼네. 출세의 뜻을 못 이뤘으나 일신은 자족하여 오천에 밭도 있고 집도 있네. 주방에는 진미가 쌓여있고 독 속에는 술이 항상 넘치네. 제사하며 봉양하고 잔치로써 즐겼네. 생전에 즐거운 일은 자리 위의 아름다운 손님이요, 하늘에서 내린 자손은 뜰 앞의 난옥일세. 용감한 무신이요, 아름다운 문사로다. 불어나는 좋은 경사 고문에 걸렸네. 어쩌다가 대단찮은 병세로 갑자기 돌아가니 금할 수 없는 것은 슬픔이요, 남은 것은 복이로다. 아름답다 현부인을 동광하라 유언했네. 무덤 앞에 돌 새기니 천추를 지내어도 다함이 없으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