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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
의희(義熙) 9년 계축(癸丑:413년)에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가 완성되었다. 실성왕은 전왕(前王)인 내물왕의 태자(太子)인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서 이를 죽이려고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였으나, 눌지의 어진 행실에 감동한 고구려 사람들이, 오히려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눌지를 임금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입김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제17대 내물왕은 13대 미추왕 이후, 처음으로 김씨계가 왕권을 장악하고 이후 계속 왕통을 지켜나간 명군으로서 신라의 국격과 군주의 권위를 높인 임금으로 평가된다. 내물왕대에 왜와 백제가 침략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군사로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해 주었고 광개토왕비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점 등을 고려할 때, 신라가 거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은 듯하다. 실제 경주 호우총(壺?塚)에서 출토된 고구려 그릇인 호우명 그릇 밑바닥에 ‘을묘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십(乙卯年國?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고구려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위력을 부담스러워 한 신라 제19대 눌지왕은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는다.
다음은 ‘금갑(琴匣)을 쏘다“란 신기한 이야기다. 제21대 비처왕(毗處王) 또는 소지왕(炤智王)이 즉위 10년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 보시오”하였다. 따라가다가 어느 못에 이르렀는데,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그 글 겉봉에,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했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길, “두 사람이라 함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라 함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하여,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했다.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니, 어떤 승려와 궁주(宮主)가 사통하고 있어 이들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후로 해마다 정월의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16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내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 노인이 나온 못은 서출지(書出池)라고 불리게 되었다. 삼국유사의 다음 기록은 지증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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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