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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85. 안동 삼구정(三龜亭)

사방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근심도 걱정도 ‘훌훌’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9월14일 18시38분  
▲ 삼구정은 김영전 형제들이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정자다.
삼구정은 안동시 풍산면 소산마을에 있다. 소산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이다. 안동김씨는 김선평을 시조로 안동에서 1,000년을 세거해 왔는데 김선평의 9세손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이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김삼근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한성판관을 지낸 김계권이고 둘째 아들은 대사헌을 지낸 보백당 김계행, 길안면에 있는 정자 만휴당의 주인이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고 보물이 있다면 청백정신 밖에 없다던 청백리다.

김계권은 다섯 아들을 뒀다. 맏아들이 학조대사다. 학조는 당대의 명승이었으며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로 칭송됐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국사(國師)의 지위에 올랐다. 둘째 아들 김영전은 사헌부 감찰, 셋째 김영균은 진사, 넷째 김영추는 수원부사, 다섯째 김영수는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삼구정 편액은 용재 이종준이 썼다.
김계권은 한성판관을 지내면서 장의동에 세거지를 마련했는데 장의동이 안동김씨 장동파가 번창하는 베이스캠프가 됐다. 김계권의 다섯째 아들 김영수는 세 아들을 뒀다. 첫째 김영과 김번이 문과에 급제했다. 김영은 벼슬살이를 하다가 소산마을로 들어와 은일의 삶을 살았고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은 할아버지 김계권이 살던 장의동에 세거하면서 안동김씨 장동파의 파조가 됐다.

김번의 후손들이 파죽지세로 번창했다. 김상용 김상헌에 이어 그의 손자와 증손자가 영의정 대사간 등 높은 벼슬을 했다. 이른바 그것을 압축하는 표현은 ‘삼수육창(三壽六昌)’이다. 손자 ‘수’ 항렬 3명과 증손자 ‘창’자 항렬 6명을 말한다. 이 계보는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김조순에게 까지 이어진다. 3명의 왕비와 15명의 정승, 6조판서와 대제학 등이 고관대작이 나왔다. 하늘을 찌르는 권세 덕에 장동 김씨로 불렸다.삼구정은 김계권의 아들 김영전 김영추, 김영수 형제가 88살의 노모 예천권씨를 위해 마을 입구의 나즈막한 언덕, 동오동산에 지은 정자다. 예천 권씨는 여름철이 되면 집에서 나와 이 언덕의 나무그늘에서 쉬기를 즐겨했다. 이를 본 아들들이 힘을 모아 1496년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현판 글씨는 《용재유고》를 쓴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출생년 미상~ 1499)이 썼다.

정자 옆에 있는 세개의 바위 삼구석. 바위의 이름을 따 정자이름을 지었다.

삼구정은 정자 옆에 있는 세 개의 바위가 거북모양을 하고 있어서 지은 이름이다. 3개의 바위는 거북 3마리가 정자를 등에 진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는 작은 돌 두 개 위에 판석을 얹은 형태인데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추정하기도 했다. 바위를 굳이 거북모양으로 본 것은 거북이 십장생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모의 장수를 염원하는 자식들의 마음이 전해온다. 정자를 세운 아들들은 명절과 기쁜 날에 어머니를 가마를 지고 정자에 올랐다. 형형색색의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노래자가 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떨며 기쁘게 했던 고사를 따랐던 것이다.

정자 안은 조선의 내로라 하는 문장가들의 기문과 시문이 가득하다. 기문은《용재총화》의 저자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이 썼다. 그는 용재 외에도 허백당(虛白堂) 등 다양한 호를 썼는데 기문에 쓴 호는 허백당이다. “풍산현은 안동부의 속현으로 고을 서쪽 5리쯤에 ‘금산(金山)’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 금산 마을 동쪽 20보 쯤에 ‘동오(東吳)’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는 예닐곱 길밖에 안 되지만 그 꼭대기에 정자가 걸터앉아 있다. 동쪽·서쪽·남쪽은 모두 넓은 들판으로 형세가 시원하게 트여 있어 전망이 끝없이 펼쳐진다.” 고 썼다.

삼구정은 소산마을 입구의 동오동산에 세워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는 사방을 개방해 풍산들을 한눈에 내려 볼수 있도록 했다.
병자호란때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장동김씨 파조인 김번의 증손자이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나자 소산마을에 들어와 김번의 옛집을 누각으로 고치고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했다. 그때 가까이 있는 삼구정에 올라 인근 경치를 돌아보며 8곳 아름다운 경관을 정하고 ‘삼구정팔경(三龜亭八景)’이라 불렀다. 김상헌의 ‘삼구정 팔경’을 받아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삼구정팔영(三龜亭八詠)’을 지었다. 이른바 ‘계택상월(谿澤象月)’ 중 2명의 대문장가가 시를 쓴 것이다.‘계택상월’은 조선 중기 네 사람의 문장가로 장유와 신흠, 택당(澤堂) 이식(李植)과),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말한다.

학교청봉(鶴嶠晴峯)
왕자는 어느 해에 궐 밖 유람 즐겼던가
복 받은 뜰 옛날 이름 천년토록 전해 오네.
맑은 하늘 부용 색깔 수려한 산봉우리
계수나무 부여잡는 시인의 가을이로다.

마애초벽(馬崖峭壁)
맑은 물굽이 짓누르며 우뚝 솟은 푸른 단애
천길 층층 쌓인 철벽 기어오를 수 없어라.
단풍잎과 들꽃은 색칠한 듯 붙어 있고
물결에 일렁이는 서늘한 그림자 기막히네.


현리연화(縣里煙花)
강물 가에 누워 있는 풍산 옛 고을
난리 뒤 누대도 절로 새로워졌구나.
해마다 흐드러진 꽃 올해도 활짝 피었나니
그 풍광 영락없이 무릉도원 봄빛일세.

역동한송(驛洞寒松)
일백 살 소나무 숲의 새로운 모습
안팎으로 비취색 고르게 깔린 언덕.
그 시절엔 사슴뿔도 거의 막아냈으련만
지금은 모두 변해 늙은 용의 비늘 같네.
- 계곡 장유의 시 ‘삼구정팔영’ 중 앞의 4영

용재 성현이 쓴 삼구정기
장교관가(長郊觀稼)
너풀너풀 춤을 추는 천 이랑의 벼들이
논두렁에 즐비하게 비단결을 이루었네.
다만 바라노니 좋은 날씨 계속되어
이 즐거움을 영원히 누렸으면.

곡저타어(曲渚打魚)
곡강(曲江) 물가에다 어구를 펼쳐 두니
그물 친 곳엔 물이 어찌나 많은지.
참으로 우스워라 피라미 떼들은
낚싯줄을 입에 물고 꼬리를 흔들어대네.


삼복피서(三伏避暑)
인간세상 삼복이면
대지가 뜨겁기 불과도 같은데
이 정자만은 도대체 어찌하여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올까.


중추완월(仲秋翫月)
일 년 중의 중추절
중추 이날 밤 달이
마음속 깊은 곳을 깨끗이 맑게 하니
나는 달의 보금자리를 더듬네.
- 상촌 신흠의 시 ‘삼구정팔영’중 뒤의 4영

정자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다. 우물마루로 깔고 사면을 개방한 초익공양식 5량가구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의 팔작집이다.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1947년에는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자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지만 사방이 탁 트여 소산마을과 풍산들을 한눈에 내려 볼 수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여름을 나기에는 그만이다. 예천권씨 노모가 여름철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앉아 있기를 즐겼다는 말이 실감난다. 실제로 여름이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나와 피서를 즐긴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고인돌로 보이는 바위돌이 흩어져 있고 오래된 나무가 기이한 형태로 시립해 있다. 오래된 느티나무도 이 언덕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언덕 아래에는 연꽃을 심은 둥근 연못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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