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를 옮겨 놓은 듯 장쾌한 비경···퇴계가 반할만 하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두개의 방과 마루로 지어졌다
도산구곡은 오천 군자리에서 청량산 입구까지 낙동강 상류 아홉굽이 50리 길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목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걷었던 길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따 이황 사후에 퇴계의 후계인 이야순 이이순 등이 설정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구곡이 10리 안팎으로 경영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산구곡은 스케일이 장대할 뿐만 아니라 굽이마다 명문가와 명현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의미가 깊다.



1곡은 운암곡(雲巖曲)이다. 운암곡이 있는 군자리는 광산 김씨들이 대대로 살았다. 김부필로 대표되는 ‘오천칠군자’가 살던 곳이다. 안동호가 건설되면서 물속에 잠겼다. 현재의 오천군자 문화재단지는 운암곡에 있던 군자리 마을을 옮겨온 것이다. 2곡은 월천곡(月川曲)이다. 횡성조씨들이 살았다. 이황의 제자로 도산서원에 배향된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이 대표적 인물이다. 3곡은 오담곡(鰲潭曲)이다. 단양 우씨들의 세거지. 퇴계가 존경하던 역동(易東) 선생으로 불리던 우탁(禹倬,1262 ~ 1342)의 서원이 있던 곳이다. 4곡은 분천곡(汾川曲),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를 비롯한 영천 이씨 600년 세거지다. 5곡은 도산서원과 퇴계 후손들이 사는 의인·섬촌, 하계와 계남일대이다. 6곡은 천사곡(川沙曲)이다. 진성 이씨들의 세거지인 원촌과 천사 마을이 있다. 원촌은 저항 시인 이육사의 고향이다. 7곡은 단사곡(丹砂曲), 8곡은 고산곡(孤山曲)이다. 8곡에는 4곡에 있던 농암 종택이 옮겨져 있다. 9곡은 청량곡(淸凉曲)이다.안동호가 조성되면서 수몰되고 6곡부터 9곡까지만 남아 있다.

고산정 현판. 강건너 마주보이는 고산의 이름을 땄다.
고산정은 도산구곡 중 8곡인 고산곡에 있다. 가송협(佳松峽)이라고도 한다. 안동과 봉화의 접경인 가송리에 있는 협곡이다. 물길이 산허리를 끊어 두 개의 절벽으로 갈라놓았다. 절벽을 내병대와 외병대라고 한다.두 개의 절벽을 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큰 물결이 장관이다. ‘큰 물길은 소리없이 흐른다’ 중국의 장가계에서 본 듯한 풍경이다. 고산정은 외병대 아래 엎드려 있다. 고산정의 강 건너편에서 보면 최북의 ‘공산무인도’ 가 연상된다. 선계를 옮겨놓으면 이런 광경일까. 정자 안에서 보이는 강 건너 절벽이 내병대이고 마주보이는 산이 고산, 독산이다. 정자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고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로 이뤄져 있으며 나머지는 마루다. 강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자연석 축대를 쌓아 땅을 높였다. 정자 안에는 이황과 금난수 이휘응 등의 시판이 걸려있다. 정자 앞에는 강 쪽으로 기운 소나무가 정취를 더해주고 정자 왼쪽에는 70년 전 조선총독부가 세운 먹황새 서식지 표석이 눈길을 끈다. 이곳은 국내 유일의 먹황새(천연기념물 200호) 서식지인데 안동시가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고산정은 성재 금난수가 지은 정자다.
고산정의 주인은 이황의 제자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1530년 ~ 1604)다. 본관은 봉화.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처음에는 김진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직장(直長)·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안동수성장으로 공을 세웠다.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저서로는 『성재집』이 있다.



1563년 지을 당시는 일동정사와 고산정을 함께 사용했다. 그의 연보에는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나이다. 선생은 항상 경전을 끼고 들어가 머물었는데,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 곳은 푸른 절벽이 치솟아 있고, 고산과 대치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징담이 있어서 작은 배를 갖추고 위 아래로 노닐며 흥취를 돋울 수 있으니, 낙동강의 명승 중 한 곳이다.” 적혀 있다.

고산정. 안동 가송협 외병대 절벽 아래 자리하고 있다.
따사롭고 아름다운 봄날 산 속에 드니

물 빛깔과 산 색깔이 화폭 속으로 번져나네

정자 위에 올라 한가롭게 노래함에 속진이 다 떨어져 나가누나

아름다운 친구와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일세

-금난수의 시 ‘고산에서 우연히 읊다’



고산정의 조선의 선비들에게 이름을 알린 이는 이황이다. 이황은 13살 때 숙부인 송재 이우를 따라 처음 청량산에 들어간 이후 청량산을 우리 집안 산(吾家山)이라고 할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다. 주세붕이 ‘유청량산록’을 써서 자신에게 발문을 부탁해오자 세 번을 읽고 우리 집안 산이라 그리워 했을 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스스로 청량산주인이고 칭했던 이황은 자신의 집이 있는 도산에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제자의 정자를 찾아오기도 하고 그저 고산정에 오고 싶어서 찾기도 했다.



고산정에서 그는 행복했다. “내가 일찍이 금난수(襟蘭秀)의 집에 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했다. 그래서 갈 때에는 말 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하는 마음을 풀지 아니하였는데, 돌아올 때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갈 때의 길 험한 것을 잊고 마치 탄탄한 큰길을 가듯 하였은즉, 마음을 잡고 놓음이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이황은 고산정에서 금난수를 위해 시도 지었고 글씨도 써주었다. ‘서고산벽(書孤山壁)’ ‘유고산(遊孤山)’ ‘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같은 시는 이황이 고산정에서 쓴 시다. 또 성성재(惺惺齋) 편액과 고산별업(孤山別業)편액도 써주었다.

퇴계 이황이 이곳에 자주 들러 시를 남겼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 이황의 시 서고산벽(書孤山壁)



이황과 금난수가 사제의 인연을 맺기까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금난수는 처남인 조목의 권유로 이황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으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금난수는 한달 동안 매일 이황을 찾았고 마침내 이황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제자로 거둬들였다. 금난수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동문들과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에 골몰했다. 그러나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자 ‘보현암 벽 위에 산에 들어온 전말을 쓰다’라는 글을 괴로운 심경을 남겼다. “산으로 들어갔을 때 마음을 씻어내고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면서 심신을 수습하고 본성을 함양하여 평일 쓸 바탕으로 삼으려 하였지만, 다른 세사에 정신이 팔려 일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공부 또한 전일 같지 못하였다. 산문을 나서기만 하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무궁한 사물의 변화를 접할 때마다 산중에서 얻었던 조그마한 것조차 끝내 보존하지 못하고 잃게 되었다.”이황은 이모습을 가상히 여겨 ‘증행시(贈行詩)를 지어 치하했다. “문원(금난수의 자) 스스로 공부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향시를 치르지 않고 경서를 들고 산으로 들어갔으니 그 뜻이 참으로 가상하다”

정자 옆에서 본 소나무와 내병대 절벽
이황은 1564년 64세의 나이로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청량산을 유람한다. 이때 금난수 이문량 금보 김부의 김부륜 권경룡 유운룡 손자 이안도 등 핵심 제자들이 동행한다. 이황은 주자가 장식과 남악을 유람하며 창수시를 남긴 예에 따라 시를 남겼는데 유명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 책을 읽는 것은 산에 노니는 것과 같다)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산을 유함한 것을 말하더니 /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은 책 읽는 것과 같구나(중략)근원을 찾아가면 사물의 시초를 알게 된다지/ 그대들에게 높은 절정을 찾으라 권면하지만/ 노쇠하여 중도에 그만둔 내가 부끄럽구나”



금난수는 1570년 이황이 타계하자 스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시를 썼다. “부모님 날 나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으시고 선생님 날 가르치셨네 / 백년을 기약하고 선생님 문하에 들었더니/ 이렇게 돌아가시니 이젠 누구에게 의지할까 / 병나면 누가 돌봐주고 의문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제퇴계 선생문) 금난수는 이황이 세상을 뜨자 김부륜, 조목, 금응협, 금응훈, 이덕홍, 김택룡 등과 함께 소위 ‘예안유림’을 대표해 류성룡 김성일 등으로 대표되는 ‘안동유림’과 세 대결을 벌이며 도산서원의 주도권을 쥐었다. 퇴계학파의 적통자리를 놓고 벌인 다툼이었다. 도산서원의 주도권을 뺏긴 안동유림은 ‘여강서원’을 세웠다가 나중에 사액이 내려옴에 따라 ‘호계서원’으로 편액을 바꿨다. 호계서원은 뒤에 류성룡과 김성일의 문인들이 이황의 좌배향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여 ‘병호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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