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쥐가 돌아왔다’라는 제목으로 사라진 그 아이를 다시 불러내고 싶습니다. 팥쥐는 언제나, 평생토록, 끈질기게, 알게 모르게, 제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일희일비, 주어진 상황에 따라 콩쥐와 팥쥐 사이를 오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사건이 만만하고 호락호락할 때 우리는 콩쥐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벅찰 때 우리는 팥쥐가 됩니다. 자기동일성도 천변만화(千變萬化), 그때그때 다릅니다. 자기는 팥쥐로 여기는데 남들은 콩쥐로 봐줄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니면서 스스로 콩쥐 연(然)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은 다 그런 콩쥐와 팥쥐의 역할을 두고 다투는 상황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콩쥐고 지는 자가 팥쥐겠죠? 그렇지만 우리 무의식 속에서는 늘 팥쥐가 주인공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콩쥐는 없는 아이고 팥쥐는 있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콩쥐 같은 아이는 아예 세상에 없습니다. 심청이도 없고 춘향이도 없는 것과 매한가집니다. 팥쥐는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그 아이는 죽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지만 그 아이는 혼자서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콩쥐도 죽고, 나도 죽고, 세상 모두가 없어져야만 팥쥐도 죽습니다.
저는 ‘팥쥐가 돌아왔다’는 제목으로 세상 모든 팥쥐의 자전(自傳)을 한 편 쓸 생각입니다. 엄연히 살아있지만, 죽은 자로 살아야 하는, 우리 속의 팥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죽었던 팥쥐가 어떻게 살아 돌아오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싶습니다. 열두 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팥쥐의 일생을 고취(鼓吹)할 겁니다. 그럴 때 팥쥐는 상징이 됩니다. 융은 말했습니다. 상징이 심리의 어둠을 뚫고 출현할 때는 항상 어떤 해명의 성격을 띤다고요. 그들 상징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성적 사고나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리 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심리 활동의 ‘자발적 산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폭로자입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쾌재를 불러봅니다. 팥쥐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