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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콩쥐 팥쥐 이야기 다 아시죠? 콩쥐에게는 대박 해피 엔드, 불멸의 성공담이지만, 팥쥐에게는 불패의 잔혹사, 최악의 실패담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의 콩쥐 팥쥐가 존재한다니까 우리가 그들 이야기에 관심 갖는 게 그닥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어쨌든, 콩쥐는 살아남았고 팥쥐는 여러 방식으로 사라졌습니다. 추방되기도 하고 삶아져서 잔치음식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팥쥐 중에서는 신데렐라 언니가 제일 유명합니다. 그녀는 탐욕스런 어머니 때문에 발뒤축까지 베어내고 피를 철철 흘리며 유리구두를 신고 분투하지만 결국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두 자매 이야기를 다 듣고(읽고) 나면 우리는 운 나빴던 팥쥐를 미련 없이 잊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며 늦잠을 잔 어느 날 아침처럼, 우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지난밤에 만났던(살았던?) 팥쥐를 깨끗이 잊습니다. 그리고 얼른 콩쥐의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어쩌다 일상 속에서도 한 번씩은 그 아이 생각을 합니다. 다문다문 그 아이의 불행을 떠올립니다. 그 아이의 불행과 함께, 게으른 것이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거야, 부모를 믿지 말고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해내야 돼, 혹시라도 착하게 살면 복이 내릴지도 몰라, 그래 참고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런 반성이나 다짐이나 가망 없는 소원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팥쥐가 돌아왔다’라는 제목으로 사라진 그 아이를 다시 불러내고 싶습니다. 팥쥐는 언제나, 평생토록, 끈질기게, 알게 모르게, 제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일희일비, 주어진 상황에 따라 콩쥐와 팥쥐 사이를 오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사건이 만만하고 호락호락할 때 우리는 콩쥐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벅찰 때 우리는 팥쥐가 됩니다. 자기동일성도 천변만화(千變萬化), 그때그때 다릅니다. 자기는 팥쥐로 여기는데 남들은 콩쥐로 봐줄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니면서 스스로 콩쥐 연(然)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은 다 그런 콩쥐와 팥쥐의 역할을 두고 다투는 상황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콩쥐고 지는 자가 팥쥐겠죠? 그렇지만 우리 무의식 속에서는 늘 팥쥐가 주인공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콩쥐는 없는 아이고 팥쥐는 있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콩쥐 같은 아이는 아예 세상에 없습니다. 심청이도 없고 춘향이도 없는 것과 매한가집니다. 팥쥐는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그 아이는 죽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지만 그 아이는 혼자서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콩쥐도 죽고, 나도 죽고, 세상 모두가 없어져야만 팥쥐도 죽습니다.

저는 ‘팥쥐가 돌아왔다’는 제목으로 세상 모든 팥쥐의 자전(自傳)을 한 편 쓸 생각입니다. 엄연히 살아있지만, 죽은 자로 살아야 하는, 우리 속의 팥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죽었던 팥쥐가 어떻게 살아 돌아오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싶습니다. 열두 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팥쥐의 일생을 고취(鼓吹)할 겁니다. 그럴 때 팥쥐는 상징이 됩니다. 융은 말했습니다. 상징이 심리의 어둠을 뚫고 출현할 때는 항상 어떤 해명의 성격을 띤다고요. 그들 상징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성적 사고나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리 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심리 활동의 ‘자발적 산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폭로자입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쾌재를 불러봅니다. 팥쥐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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