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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88. 서울 세검정(洗劍亭)

인조반정·삼전도의 굴욕···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증언대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10월19일 18시26분  
▲ 정면 3칸 측면 한칸 구조에 정면 가운데 칸은 계곡쪽으로 한칸 내밀었다.
세검정은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다. 상명대 입구에서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가다보면 계곡 가에 서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 밖 탕춘대 옆이다. 탕춘대는 연산군이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조는 탕춘대에 거동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라 했다.

세검정은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반정 성공 후 칼을 씻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검정은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증언록이다. 광해군 15년(1623) 이귀와 김류 등이 홍제천에 집결한 뒤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궁궐에 들어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했다. 많은 이들이 죽고 상했다. 반정군은 홍제천으로 돌아와 피 묻은 칼을 씻었고 정자를 세검정이라 불렀다. 세검은 더 이상 칼을 쓸 일이 없는 태평성대를 맞았다는 선언적 의미이다. 평화는 칼로 얻어진다는 역설을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권을 거머쥔 뒤 14년 뒤 병자호란을 맞았다.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겪었다. 힘으로 뺏은 정권이 힘이 없어 당한 굴욕이다.


세검정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숙종때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기 위해 병영을 설치하고 군인들의 쉼터로 세웠다고 한다. 또 영조 23년(1747)에 총용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의 쉼터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곳은 수도의 북방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홍제천 상류쪽에서 본 세검정. 자연 암석 위에 한마리 학이 내려앉은 형상이다.
세검정은 삼각산과 백운산 두 산 사이에 있다. 두 산에서 흘러나온 홍제천의 물이 맑은데다 넓고 괴이한 바위가 많아 도성에서 경치 좋은 곳으로 꼽혔다. 때문에 시인묵객의 시와 그림이 넘쳐났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년)은 부채에 〈세검정도〉를 그렸다. 비온 뒤 홍제천 계곡물이 콸콸 내려오는 모습과 세검정에 앉아 물구경을 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 말의 화가 혜산 유숙 (蕙山 劉淑,1827∼1873)의 ‘세검정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세검정의 폭포는 정조와 정조가 아끼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이 좋아한경치다. 정조는 한양의 볼만한 경치 8군데 가운데 하나로 세검정의 폭포를 꼽았다. 세검정은 평소에 물이 그리 많지 않아 폭포를 볼 수가 없었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면 없던 폭포가 생겨나므로 도성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와 물구경을 했다고 한다. 세검정의 폭포를 한양 8경으로 꼽았던 정조는 겨울에 세검정을 찾아 시를 남겼다.


세검정 앞에는 온갖 길이 빙판이고
낭떠러지 깊은 구렁엔 눈서리 얼어 붙으니
유리는 삼천 세계에 어지러이 펼쳐졌고
붕학은 구만 층의 창공으로 날아오르누나
맨발로 걷노라면 여름 갈증이 사라지고
얼음은 캐어다가 주릉으로 들인다오
성인이 임리에 밝은 경계를 남겨두었기에
여기 이르니 내 마음 갑절이나 두려워지네

- 정조의 시 ‘세검정 얼음폭포(洗劍氷瀑)’

홍제천 계곡 건너편에서 본 세검정
장마철에 폭포를 보며 즐겼던 일은 정약용의 ‘세검정에서 노닌 기록 遊洗劍亭記’에 나와 있다. 정약용이 30세 되던 1791년 5월이었다. 한 해 전에 가톨릭교인 이라는 이유로 남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해미로 유배됐다가 10일 만에 해배 됐고 돌아와 사헌부 지평으로 일했다. 해가 바뀌어 5월에 사간원 정언으로 발령받았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수원 화성 설계 작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러나 천주교인으로 지목돼 정적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에서 한혜보 홍약여 이휘조 윤무구 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이 치고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조가 세검정의 폭포를 도성의 8경 중 하나로 지목했던 것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정약용은 벗들을 재촉했다. 만약 물구경을 가지 않을 것이면 술 열병을 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세검정 아래 자연암석에 새겨진 암각서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창의문을 나섰다. 비가 벌써 몇 방울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서둘러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렀다.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 하였다. 옷자락이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 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중략) 술과 안주를 내오라 명하여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잦아 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 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개 베고 기대 시를 읊조리고 누웠다”


정약용은 세검정을 여러 차례 다녀가며 유기 외에도 시를 남겼다.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검정에 이르러 ‘장남삼아 육언시를 짓다’라든가’·‘세검정에서 놀며’같은 시를 썼다.


서로 만난 두 비탈 있지 않으면
뭇 골짝 흐르는 물 어찌 맡으리
장마비 시름한 지 오래인지라
성문 나와 놀이를 한번 가졌네
날리는 물거품에 반석 차갑고
푸른 그늘 어두워 난간 그윽해
문틀 위에 서렸네 군왕의 기운
임금 글씨 명루를 제압하누나

- 정약용의 시 ‘세검정에서 놀며’

세검정 앞 너른 바위에서 세초행사가 이뤄졌다.
세검정은 사초를 세초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의 사관은 왕의 말과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글로 기록했다. 사초는 왕과 관련한 사관의 기록이다. 왕이 죽고 나면 사초를 모아서 기록물을 만드는데 그 기록물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 편찬이 끝나면 편찬에 참여했던 관리들이 모두 세검정에 모여 정자 아래 흐르는 물에 사초를 씻어낸다. 세초라고 한다. 종이에 묻은 먹물을 씻어낸다. 사초의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종이는 재활용한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다. 바위에 차일을 치고 행사를 했기 때문에 바위를 차일암이라고 했다. 세초가 끝나면 관리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세초연이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선왕의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에다 자기 자신 역사적 기록을 보면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도 됐다.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사다. 《동국여지비고》는 “세검정은 열조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구경을 하였다”라고 썼다.


정자 앞 판석은 세초 행사 외에도 여염집 학동들의 붓글씨 연습 장소였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니 붓과 먹을 들고 나와 평평한 바위 위에 글을 썼던 것이다. 《한경지략》은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 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 흐르는 사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적었다.

세검정은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해 복원했다.
세검정은 1941년 이 근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돼 주초 하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77년 5월에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참고로 복원했다. 도시계획선과 물려 있어 원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원위치에서 주초가 발견되면서 도시계획을 변경해 제자리에 복원했다. 서남향에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하고 가운데 칸이 넓고 양쪽이 좁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개천 쪽으로 가운데 한 칸을 내밀어 ‘丁’자형 평면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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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이 역사적 장소는 관리주체인 행정당국의 몰지각한 운영으로 사람을 밀어내고 있다. 정자 안에 들어갈 수도 없을 뿐 더러 정자에 열감지기를 부착해 다가가면 경보음이 울리도록 해놓고 있다. 사진이라도 찍을 요령으로 다가 갔다가 경보음이 울리는 바람에 기절초풍할 뻔 했다. 옛사람과의 소통을 관리 편의만 생각해 당국이 막고 있는 것이다. 정자 아래를 흐르는 계곡물도 더럽고 악취를 풍겨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이럴 것이면 표지석이나 하나 만들어 놓을 일이지 정자는 왜 복원했는 지 모르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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