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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무 수필가
직장 선배의 손자가 경영하는 농약사에 들렀는데 농약을 사러 온 노인 몇 사람이 앉아서 한가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필자는 기차를 타거나 장거리 버스를 탔을 때는 옆 좌석에 비슷한 또래이면 먼저 말을 걸고 어디에 살고 계시며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대담을 하면서 가면 비록 초면이지만 금방 소통이 되고 여행 시 무료(無聊)함이 해소된다.

초면에 먼저 말을 걸고 마음을 준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 생각에는 프라이버시라 주착(做錯)하다고 볼지 모르나 일면으로는 사생활에 있어서 이와 같이 대인관계가 이롭고 원만하다는 호평도 있다.

오늘도 같이 자리한 옆 노인에게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어디서 살고 계시느냐고 언두를 띄우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필자보다 한두 살 위로 보이면서 소탈한 성격으로 보이고 농사 이야기, 당신 무릎의 퇴행성관절염을 수술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필자도 퇴행성관절염으로 병원에 가는 길이라서 더욱 대화 상대로 맞장구치면서 금방 친숙한 분위기였다.

누구나 삶의 프레임에서 매일 매일 지긋지긋하고 지루한 일상(日常)에서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의 걱정에서 잠시라도 잊은 채 부담 없고 속박 없는 자리에서 마음대로 유유상종, 역지사지 입장에서 차별 없이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안도감으로 엔돌핀이 몸을 감싸주는 즐거운 기분이어서 이것이 행복감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진정한 행복이란 미래에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행복은 내일과 나중이 없고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 옆 사람과 담소(談笑)하고 긍정적으로 소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철학자 ‘알랭’은 진정한 행복은 내 앞에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그것이라 하였고, 행복이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며 저축되지 않는 점을 지적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번 큰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게 행복의 관점에서 더욱 유리하다는 것이다.

행복해 보이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 대기업 회장, 철학자, 목사에게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행복을 가지려고 권력, 명예, 돈은 가져 봤어도 행복이 뭔지 모르며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추운 거리에서 적선을 기다리는 걸인을 만나 행복이 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오늘 저녁 먹을 끼니와 잠잘 곳만 있으면 행복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경행록에 지족가락(知足可樂) 무탐칙우(務貪則憂)라고 가진 것으로 만족함을 알면 가히 즐거운 것이요, 탐하는 일에 힘쓰면 근심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탐욕이 있으면 더 가지려는 고민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 마음을 비우면 그 자리가 행복을 채워주는 그릇이다.

앞에 이야기한 권력자와 부자들이 가지고자 하는 빈자리가 늘 가난하고 고민과 수심이 따르기 때문에 불행하다.

부연하면! 대인관계는 소통이 관건인데 소통은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먼저 인사, 악수(당신과 나는 동감이며 믿는다는 것)하고 상호 존중하며 배려하는 마음에서 마주 보고 경청하면서 당신 말이 맞는다고 하는 맞장구는 더욱 호감이 간다.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야 하고, 대화 과정에서 미소, 겸손, 칭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칭찬에 발이 달렸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만사형통으로 신뢰를 구축하며 조직에서는 일의 능률과 화합협동의 계기가 된다. 불통을 언로가 막히고 괴롭고 아프다. 한의학에서는 인체도 불통칙통 통칙불통(不通則痛 通則不痛)이라 했다.

다소곳한 장소에서 인생역정(人生歷程)을 잠시 잊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터놓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즐거움이 내 마음의 행복이요 나만이 가지는 행복임을 알게 됨을 부담 없이 대화를 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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