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명운이 걸린 큰 문제를 다룰 때 다수의 일반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 합리적인 일인가. 더군다나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동원돼야 할 원자력과 같은 문제의 경우는 일반인이 판단하는 공론조사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비판의 강도가 지금보다도 더 강했던 조선 시대의 공론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조선 시대 여론의 진원은 사림(士林)이었다. 향촌에 생활 근거를 갖고 성리학을 공부하던 지식인 집단인 사림의 비판의식은 여론화 과정을 거쳐 공론화했다. 그것이 각 학파의 청의(淸議)로 인정되면 중앙 정파에 전달됐다. 때론 서원이나 성균관이 매체가 됐다. 더욱 직접적으로는 상소(上疏)라는 제도적 장치로 최고 통치권자인 왕에게 전달됐다.

농촌의 밭 가는 밭두렁이나 새끼꼬던 사랑방 민초의 쑥덕공론과 아낙네들의 우물가에서 나누던 우물공사(公事)가 재야 지식인에게 전해져 일반공론이 됐던 것이다. 공론이 필요한 것은 어떤 문제의 시비(是非)를 분명히 가리는데 있다. 이 때 중요한 비판의식의 잣대는 ‘공심(公心)’이냐, ‘사심(私心’이냐다. 비판의식은 공정하고 도리에 맞아야지, 개인적인 이득이나 욕심을 위한 것은 의미가 없다.

조선 시대에는 비판이 일이었던 언관(言官)을 관료기구 속에 제도화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의 관료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비판이 의무였기 때문에 비판을 회피하는 것은 직무유기였다. 그들은 최고의 균형감각과 절제된 비판의식을 보여줘야 했다.

신고리 5, 6호기 건설을 중단할 것이냐, 공사를 재개할 것이냐를 두고 시민참여단 471명의 공론화위원회 최종 조사 결과 ‘건설 재개’ 59.5%, ‘건설 중단’40.5%를 응답, 탈원전 환상을 간신히 막아냈다. 문재인정부의 간판 공약이 백지화된 것이다. 정부는 공론조사를 숙의민주주의니, 집단이성이니 하지만 사회적 갈등과 허비한 비용이 너무 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애초에 국가적으로 막대한 손실이 불 보듯 뻔한 일을 놓고 공약파기의 책임 회피용으로 공론조사를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공약을 지키지 못할 사안이 생기면 또 공론조사를 벌일 것이다. 조선 시대 3사 역의 국회라는 공론기구가 분명히 있는 데도 말이다.

이동욱 편집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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