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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살다 보면 언제나 몸이 문젭니다. 아픈 것도 몸, 실수나 실례를 저지르는 것도 몸, 보기 좋은 것도 몸, 보기 싫은 것도 몸입니다. 모든 게 몸 때문입니다. 결국은 살고 죽는 게 다 몸입니다. 그래서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거고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는 거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다라는 말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가진 것은 달랑 몸 하나뿐이라는 걸 명심하고 열심히 몸 간수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 같습니다. 운동도 꾸준하게 해야겠고 몸에 좋은 것도 많이 먹어야겠고 스트레스로 몸을 괴롭히는 일도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사람의 몸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입니다. 먼저 마음이나 재물로 정성을 다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사람들은 몸을 바칩니다. 에밀레종 설화나 ‘심청전’의 희생공양(犧牲供養)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꼭 필요한 대종(大鐘)을 만들 수 없고, 무엇을 바쳐도 바다의 격한 풍랑을 가라앉힐 수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람의 몸이 선택됩니다. 인신(人身) 공양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노력이 닿을 수 없는 그 신비의 심연(深淵)에 호소하는 방법은 오직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치성을 드려 낳은 자기 아이를 펄펄 끓는 쇳물 안에 던져 넣거나 가난하지만 멀쩡한 처녀를 ‘공양미 삼백 석’에 사서 바닷물에 수장(水葬)시킵니다. 그들 희생물들이 권력, 권위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비의 심연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부족들은 자신의 족장을 희생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인신 공양은 어디서나 집단의 안녕을 도모하고 질병이나 불안을 예방하는 효과를 보여 왔습니다. 뒤집어 보면 그것 이상의 제물을 마련할 수 없는 인간의 형편에서는 어떤 결과라도 그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심청이는 조금 다릅니다. 그녀를 희생제물을 자청한 효녀의 대표격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청(自請)해서 공양물이 된, 효행 사상을 선양하는 상징물로만 심청이의 사신(捨身·도의 성취를 위해 몸을 바침)을 읽는 것은 제대로 된 독법이 아닙니다. 그 부분을 우리는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런저런 다른 길이 있었으면 심청이는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정도 총명한 아이라면 어떻게든 아버지와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한 길, 외길로 내몰립니다. 자신의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 속에 놓입니다. 그렇게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가난? 효심? 아닙니다. ‘아버지의 눈먼 자로서의 한’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가난하고 못난 모든 대중의 대표자입니다. 눈 먼 한 사람의 가난하고 못난 애비에게 세상의 불평등을 죄다 투사시킵니다. 그래서 심학규의 눈만 뜨게 하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세상 뒤집기’가 요구했던 것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심청이의 사신은 결국 주효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심청이는 부활했고, 슬프거나 말거나 심청이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불전(佛殿)에 바쳐 얻을 수 있는 은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선물을 우리에게 안겼습니다. 제 아비 한 사람의 눈만 뜨게 한 것이 아니라 몽매(蒙昧)한 우리들의 ‘몸의 눈’을 뜨게 하는 개안(開眼)의 시혜가 베풀어졌습니다.

안 되면 몸을 던져라, 심청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필요한 것은 치성(致誠)이 아니라 투신(投身)이다, 격랑의 역사 앞에 선 우리에게 심청이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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