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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새경북포럼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녀석은 평소 사용하던 수건에 싸여 소파 위에 놓였다. 통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세상을 떠났다. 미남아 잘 가라, 함께여서 행복했다. 애절한 맘으로 눈꺼풀을 쓰다듬으니 그제야 잠자는 듯했다.

검은 배변을 쏟는 증세를 두고 일과를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생활의 시계는 바삐 돌아갔고 찜찜함도 잊힐 무렵, 울먹임 가득한 통보가 왔다. 미남이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부고(?). 일순간 가슴이 북받치고 콧등이 시큰했다. 간만에 맞닥뜨린 죽음의 충격파. 간절한 눈빛과 출퇴근을 반겨주던 애교가 사라지다니. 안식구 품에 안겨 엉덩일 씻다가 죽었다는 게 크나큰 위로다.

애틋한 교감을 주고받는 사랑엔 대가가 따른다. 생명이란 유한하기에 그렇다. 언젠가 마주할 이별은 어떻게 마무리되느냐가 중요하다. 급격한 결별일수록 쓰라린 상처로 남는 법이다. 참척의 아픔을 겪은 작가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그 고초를 절절히 묘사했다. 의사인 이십대 아들을 창졸간 사고로 보낸 그녀는 주님이 두려웠다고 기도한다. 당신께서 남은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웠노라 고백할 정도다.

애견을 키우지 않는 가정은 주인의 마음을 모른다. 반려견은 그냥 개가 아니다. 소중한 가족의 일원이다. 매일 침대를 같이 쓰고 음식을 나누는 사이다. 어쩌다 뵙는 엄마보다 친근한 만남의 현재 진행형이다. (죄송해요 엄마)

칠 년 못 채운 짧은 생 미남일 묻었다. 진료 수첩 그리고 장난감과 더불어 뒷산에 매장했다. 야생의 짐승이 사체를 넘볼까 잔돌과 고사목을 옮겨와 덮었다. 가슴은 흐느껴 울었으나 눈물은 없었다. 나이를 먹으며 눈물샘이 말라버린 때문일까. 아님 세파에 부대껴 분비물을 잃어버린 탓일까. 그런 면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감성이 곱디곱다. 아내의 눈시울은 벌겋게 흘러내렸다.

눈물은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치유의 묘약. 슬플 때 잘 우는 사람은 병에 덜 걸린다. 남성의 평균 수명이 여성에 비해서 짧은 이유는 울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언젠가 통계를 보니 의료 사고가 의외로 잦아서 적잖이 놀랐다. 개에게도 비슷한 사건이 생기리라고 여긴다. 녀석은 동물병원에 다녀온 이튿날 죽었다. 혈액검사, 엑스레이, 수액주사 등 치료비 24만원을 지불했다. 우리와 달리 의료보험이 안 돼 비싸다. 신장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진찰 결과. 와중에 스트레스도 심했으리라. 다행히 생돈이 아깝다는 후회는 없었으니 스스로 대견하다.

재롱둥이 부재의 상실감은 의외로 깊었다. 일상의 루틴엔 서러운 흔적이 촘촘히 드리웠다. 생기가 날아간 아파트는 적막감이 감돈다. 따뜻이 대했노라 자위하기엔 단명의 삶이다. 발랄한 스킨십이 한없이 그립다.

자택 인근의 산책로엔 서로의 그리움이 배였다. 수시로 영역을 표시하던 가로수와 가로등에도, 소나무와 상수리 우거진 뒷산의 오솔길에도, 캣맘과 친구들 반겨주던 길공원에도, 청명한 가을은 푸르게 서럽다. 이젠 잊자. 망각의 시간이 기억을 떨치지 않겠는가.

현실 세계에서 해피엔딩이 가능할까. 모든 끝은 아련한 비애가 어렸다. 미사여구로 포장할지라도 이면엔 한탄이 스몄다. 행복한 추억을 아무리 회상한들 쓰라린 마지막 무게를 감당하랴.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낸 고통에 몸부림친 박완서 작가는 말한다. 아픔은, 슬픔은 절대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 그냥 견디며 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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