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날 반기고 밝은 달 날 감싸니 무릉도원 부럽잖네
제천 청풍에 한벽루가 있다. 고려 충숙왕 4년( 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세웠다. 1406년(태종6) 군수 정인홍이 중수하고 1634년(인조 12)에 개창했다. 1972년 수해때 붕괴됐다가 1976년 다시 복원했다. 1983년 충주다목적댐이 조성되면서 물에 잠긴 마을이 5개 면에 걸쳐 61개 마을이나 됐다. 청풍면에서는 27개 마을 중 2개 마을만 수몰을 면했다.청풍문화재 단지는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물에 잠기게 된 청평지역 문화재를 한곳 모으기 위해 조성됐다. 남한강가의 망월산 자락, 청풍호(충주호와 같은 호수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했다. 한벽루와 고려시대 불상인 청풍 석조여래입상, 도화리 고가, 지석묘와 문인석, 생활유물 2천여 점을 옮겨 옛 고을을 그대로 되살려놓았다. 충주다목적댐은 제천과 충주 단양의 세 개 자치단체에 걸쳐 있는 호수다. 자치단체마다 충주댐 청풍댐 단양댐으로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다.
물빛은 하도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산의 기운은 아득하니 연기 아닌 연기로세
차가움과 푸름이 서로 응겨 한 고을 만들어
맑은 바람은 영원토록 전하는 이 없구나
- 주열의 시 ‘한벽루’
그 산수의 승경과 구조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지 못해 자상히 알 수 없으나 청풍이니 한벽이니 하는 이름만 들어도 사람으로 하여금 뼈끝까지 서늘하게 한다. 훗날에 적송자와 함께 노니려는 계획이 이루어져 다시 죽령의 길을 지나게 되면 마땅히 그대를 위해 한번 들어가 구경하고 문절공의 시를 읊으면서 수백년 전의 그 인물을 상상하며 또 그대의 유애에 대하여 시 한편 짓고 떠나가리라”라고 적었다.
한벽루는 사실상 청풍명월의 주인이다. 찬바람(寒)과 푸른 물결(碧)이 일렁이는 누각은 조선 풍류가의 달빛 음악회가 열리던 곳이다. 이황 윤선도 이승소 류성용 서거정 정약용 허균 송시열 정선 이방운 같은 내로라는 조선의 명사와 시인 묵객들이 시와 그림을 남겼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청풍문화단지에 박제된 한벽루에서 조선 선비의 흥취가 물씬 묻어나는 데는 시와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정선이 그린 ‘한벽루’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이방운이 그린 ‘금병산도’에 한벽루는 국민대 박물관에 있다. 정선의 ‘한벽루’는 부드러운 필치에 정적이 감도는 정물화인 반면 이방운이 그린 그림은 생기가 넘친다. 금병산 아래 남한강에는 풍류객들이 범선과 나룻배에 나누어 타고 선유를 즐기고 있다. 강 건너 밭에는 농부가 소를 끌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한벽루에는 선비들이 여럿 앉아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감상하고 있다. 한벽루 옆에는 여러 채의 객관건물이 그려져 있다.
눈길을 끄는 시편은 이황과 류성룡, 스승과 제자의 시다. 이황은 저녁 무렵의 한벽루 주변의 한가로운 풍경을 한편의 서경시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임진왜란을 맞은 제자 류성룡의 시는 비통하다. 류성룡은 합천에 있다가 행재소로 올라오라는 왕명을 받고 해주로 향했다. 원주 신림원에 이르렀을 즈음 ‘우선 본도에 머물러 제장들을 단속하라’는 지시를 받고 한벽루에 발길을 멈췄다.
한벽루 높다랗게 자색 하늘에 솟았는데
개울 건너 마주하니 구름 병풍 펼친 듯
갓 개인 저녁 외로운 배에 기대어 보니
거울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데 푸르름 하나로 덮였네
- 이황의 시 ‘한벽루를 바라보며’
달은 져서 아스라히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날이 추워 까마귀는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객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밤새 서리내리고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만 희었네
서글픈 눈물 끝없이 흘리며
위태로운 난간에 기대어 북극만 바라보네
-류성룡의 시 ‘청풍한벽루에 묵으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