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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90. 제천 한벽루(寒碧樓)

맑은 바람 날 반기고 밝은 달 날 감싸니 무릉도원 부럽잖네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10월30일 18시38분  
한벽루는 조선의 내로라는 시인 묵객이 시와그림을 남긴 명소다.
“만물은 주인이 있지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주인이 없어 취하는 자가 주인(소동파의 적벽부)”이라고 했다. 제천의 청풍이 ‘맑은 바람과 밝은 달’(淸風明月)을 고장 이름으로 짓고 풍월주인(風月主人)이 됐다. 1914년 제천군과 청풍군이 제천군으로 통합되면서 제천이 청풍명월을 안았다. 조선 세조 성종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이승소는 청풍을 이렇게 노래했다. “호남 50성을 두루 다녀보았지만 경치 좋은 땅, 오늘에야 그윽한 정취를 만난다. 산이 좋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납극( 나막신에 초를 바름. 진나라의 완부는 나막신을 좋아하여 납을 발라 윤이 나게 하였다함)을 하려고 생각하고 강이 맑으니 나를 불러서 먼지 낀 갓끈을 빨게 한다. 도원이 반드시 인간세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고기잡이 늙은 이를 따라 이 생을 보내려 한다.” 이승소가 보았던 조선시대의 청풍은 도연명이 말하는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경치였고 살고 싶은 곳이었다.

한벽루 옆에 있는 응청각
제천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북쪽은 평창과 닿아있고 동쪽은 영월과 나란히 하고 있다. 때문에 직제학을 지냈던 원호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가자 송학면 장곡리 산언덕에 ‘관란정’을 짓고 정자 밑을 흐르는 강물에 과일과 편지를 보내며 탄식하며 지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만첩 산중에 있는 깊은 산골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만 하다”라고 적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이 제천에서 태어났다.


제천 청풍에 한벽루가 있다. 고려 충숙왕 4년( 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세웠다. 1406년(태종6) 군수 정인홍이 중수하고 1634년(인조 12)에 개창했다. 1972년 수해때 붕괴됐다가 1976년 다시 복원했다. 1983년 충주다목적댐이 조성되면서 물에 잠긴 마을이 5개 면에 걸쳐 61개 마을이나 됐다. 청풍면에서는 27개 마을 중 2개 마을만 수몰을 면했다.청풍문화재 단지는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물에 잠기게 된 청평지역 문화재를 한곳 모으기 위해 조성됐다. 남한강가의 망월산 자락, 청풍호(충주호와 같은 호수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했다. 한벽루와 고려시대 불상인 청풍 석조여래입상, 도화리 고가, 지석묘와 문인석, 생활유물 2천여 점을 옮겨 옛 고을을 그대로 되살려놓았다. 충주다목적댐은 제천과 충주 단양의 세 개 자치단체에 걸쳐 있는 호수다. 자치단체마다 충주댐 청풍댐 단양댐으로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다.

한벽루의 익랑.
한벽루에 오르기 위해서는 행랑격인 익랑을 거쳐야 한다.
한벽루는 청풍문화단지 제일 뒤쪽에 자리잡았다. 청풍호를 등지고 있다. 본채는 앞면 4칸 옆면은 3칸의 2층 누각이다. 오른 쪽에 계단식 익랑을 두고 있는데 앞면 3칸 옆면 1칸이다. 밀양의 영남루가 좌우에 익랑을 두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벽루는 오른쪽에만 익랑이 있다. 태종때 청풍군수 정인홍이 한벽루를 중수하고 당시 최고의 파워엘리트 하륜의 중수기를 얻고 싶어했다. 정인홍은 하륜이 청풍 인근을 지날 때 마다 마중을 나가 한벽루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랑을 늘어놓은 뒤 편지를 써 중수기를 부탁했다. 정인홍은 하륜을 만날 때 고려 고종때 문신인 주열의 7언절구를 인용했다. 주열은 남원 판관 나주 정주 승천 장흥 등지의 수령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충청 전라 경상 3도 안렴사를 지내며 지방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장과 글씨가 능했고 성품이 활달했다.


물빛은 하도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산의 기운은 아득하니 연기 아닌 연기로세
차가움과 푸름이 서로 응겨 한 고을 만들어
맑은 바람은 영원토록 전하는 이 없구나

- 주열의 시 ‘한벽루


한벽루의 누하주. 약한 배흘림 기둥이다.
정인홍의 당부가 통했다. 하륜은 드디어 한벽루 중수기를 써기로 했다. 한벽루에 걸려 있는 ‘청풍 한벽루 중신기 淸風寒碧樓重新記’다. “내가 예전에 여러 번 죽령 길을 지난 일이 있었는데, 청풍군수가 매양 길가에 마중 나왔다. 산수의 형세를 물으니, 한벽루를 칭하고 또 주문절공(朱文節公)의 4구시를 외워 주었다. 나는 듣고 즐겁게 여겼으나 항상 바빠서 한 번도 들어가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군수 정수홍 군이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청하기를, ‘이 고을 한벽루가 온 고을에서 이름이 나 진실로 경치가 기절한데, 수십 년 이래로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쳐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군에 도임하여 다행히 나라의 한가한 때를 만났기에, 금년 가을에 공인(工人)을 청하여 수리하였습니다. 들보나 기둥이 썩고 틀어진 것은 모두 새 재목으로 바꾸었는데, 다만 갑자기 겨울이 닥쳐서 단청만 못했을 뿐입니다. 청컨대 그대는 기문을 만들어서 뒷사람에게 보여 주게 하소서.(중략)


그 산수의 승경과 구조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지 못해 자상히 알 수 없으나 청풍이니 한벽이니 하는 이름만 들어도 사람으로 하여금 뼈끝까지 서늘하게 한다. 훗날에 적송자와 함께 노니려는 계획이 이루어져 다시 죽령의 길을 지나게 되면 마땅히 그대를 위해 한번 들어가 구경하고 문절공의 시를 읊으면서 수백년 전의 그 인물을 상상하며 또 그대의 유애에 대하여 시 한편 짓고 떠나가리라”라고 적었다.

한벽루의 편액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한벽루는 사실상 청풍명월의 주인이다. 찬바람(寒)과 푸른 물결(碧)이 일렁이는 누각은 조선 풍류가의 달빛 음악회가 열리던 곳이다. 이황 윤선도 이승소 류성용 서거정 정약용 허균 송시열 정선 이방운 같은 내로라는 조선의 명사와 시인 묵객들이 시와 그림을 남겼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청풍문화단지에 박제된 한벽루에서 조선 선비의 흥취가 물씬 묻어나는 데는 시와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정선이 그린 ‘한벽루’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이방운이 그린 ‘금병산도’에 한벽루는 국민대 박물관에 있다. 정선의 ‘한벽루’는 부드러운 필치에 정적이 감도는 정물화인 반면 이방운이 그린 그림은 생기가 넘친다. 금병산 아래 남한강에는 풍류객들이 범선과 나룻배에 나누어 타고 선유를 즐기고 있다. 강 건너 밭에는 농부가 소를 끌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한벽루에는 선비들이 여럿 앉아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감상하고 있다. 한벽루 옆에는 여러 채의 객관건물이 그려져 있다.


눈길을 끄는 시편은 이황과 류성룡, 스승과 제자의 시다. 이황은 저녁 무렵의 한벽루 주변의 한가로운 풍경을 한편의 서경시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임진왜란을 맞은 제자 류성룡의 시는 비통하다. 류성룡은 합천에 있다가 행재소로 올라오라는 왕명을 받고 해주로 향했다. 원주 신림원에 이르렀을 즈음 ‘우선 본도에 머물러 제장들을 단속하라’는 지시를 받고 한벽루에 발길을 멈췄다.


한벽루 높다랗게 자색 하늘에 솟았는데
개울 건너 마주하니 구름 병풍 펼친 듯
갓 개인 저녁 외로운 배에 기대어 보니
거울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데 푸르름 하나로 덮였네

- 이황의 시 ‘한벽루를 바라보며’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달은 져서 아스라히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날이 추워 까마귀는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객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밤새 서리내리고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만 희었네
서글픈 눈물 끝없이 흘리며
위태로운 난간에 기대어 북극만 바라보네

-류성룡의 시 ‘청풍한벽루에 묵으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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