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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만약 우리 인생에 잡담(雜談)이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거의 독거노인으로 지내는 요즘의 제 형편이 그런 잡념을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루 일과가 너무 단순합니다. 연구년이라 수업도 면제 받고 있는 터라 출근해서 하루 종일 연구실에 앉아서 책 보고 글 쓰는 일이 제 생활의 전부입니다. 점심시간에 잠깐 구내식당에 가서 동료들과 잡담 한 토막을 나누고 올 수 있으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고요.

사람은 왜 말하려고 할까?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잡담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득을 취하려고 말을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것입니다. 누구나 사기를 당할 때의 느낌은 똑같습니다. “정말이지 진짜 같았다”는 겁니다. 조금도 의심을 사지 않는 것이 바로 사기꾼의 화법입니다. 피해자의 욕구나 욕망, 혹은 욕심을 잘 파악해서 그가 듣고 싶은 요점을 빠르고 신속하게 공략하기 때문에 속는 사람은 속아도 속는 줄 모릅니다. 둘째,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서 말을 합니다. 욕을 하거나 하소연을 하거나 울분을 토로하고 싶거나 과시하고플 때 말을 합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뒤끝 있는 동물이지요. 배운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자기는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사람이라면 감정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합니다. 이성은 언제나 감정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합리화의 수단이 되거나 자기방어나 과시의 목적에 종사합니다. 정치가, 학자들의 화법에는 이 두 번째 말하기의 동기가 많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심심할 때 사람은 말을 합니다. 어린애들이 혼자서 놀 때 종종 혼자 말하는 걸 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마 소설가일 것입니다. 어느 시 잘 쓰는 시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설은 도저히 못 쓸 것 같다.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긴 이야기를 끄집어낼 자신이 없다”라고요. 저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진짜, 심심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라고요.

잡담의 효능을 잘 보여준 TV 프로그램이 있어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알쓸신잡’이라는 프로입니다. 출연자를 일부 교체해서 ‘알쓸신잡 시즌2’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첫 회는 안동 지역의 명승지를 둘러보면서 나누는 잡담이었습니다. 헛제삿밥, 안동소주, 하회탈, 병산서원, 도산서원, 퇴계와 서애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맛깔나게 전개되었습니다. 다 좋았지만 한두 가지 불만을 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한 출연자가 퇴계와 고봉(高峯)의 사단칠정 논쟁을 설명하면서 그 항목들을 순서대로 줄줄 외우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4단과 7정의 11개 항목이었습니다. 저도 수업할 때 한 번씩 소설 속의 한두 문장을 외워서 학생들에게 들려줄 때가 있습니다. 좀 재미있게 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10개 이상의 항목을 줄줄 외운 적은 없습니다. 그 정도 분량이면 칠판에 적거나 프린트로 미리 나누어 줍니다. 많이 외워서 대화의 선편(先鞭·앞자리)을 잡겠다는 발상은 앞서 우리가 나눈 말하기의 종류 중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감정 처리의 목적 실행, 즉 과시적 말하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준 높은 세 번째 말하기, 잡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소설가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덜 심심한 자들의 화법입니다. 아마 프로그램의 성격, 혹은 시청률에 대한 욕심이 그렇게 강요한 것 같습니다. 프로들이 나와서 잡담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획인데 실수한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럴만한 지식도 통찰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만 잡담의 묘미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 말씀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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