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세계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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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결정된 31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세워진 독립지사 김광제, 서상돈 흉상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윤관식기자 yks@kyongbuk.com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의 국권이 침탈당했다.

이처럼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기 위해 출범한 대표적인 활동이 국채보상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대구가 조선후기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상업중심지였고 약령시로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 부근에 대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이 대구에 많이 거주했으며 중농층 이상이 상업을 통해 상인자본으로 성장하는 등 대구는 신흥상업도시로 급부상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를 대동광문회로 확대하고 그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모인 특별회에서 발단이 됐다.

대동광문회 회의에서 논의를 거친 후 대동광문회 회원인 서상돈이 국채를 갚자고 제안,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서상돈은 자신부터 800원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내어 놓았으며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가 3개월 치 담뱃값 60전과 의연금으로 10원을 내는 등 그 자리에서 2천여 원이 모금됐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이 회의에서 대동광문회 회장에 박해령, 부회장에는 김광제가 선출됐다.

같은해 2월 21일 김광제,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등이 중심이 돼 대구민의소 총회 석상에서 단연회를 설립하고 500원을 모금했다.

같은 날 대구민의소는 서문시장 인근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들의 다짐은 ‘국채 1천300만 원 보상취지’라는 제목으로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확대됐다.

국채보상발기문과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보면 전 국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 일본의 국채를 갚자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담배가 대상이 된 것은 당시 한국에 이주해 온 일본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대표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인 것이 영향을 미쳤다.

같은해 2월 23일 대구 여성들도 남일동에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선언했다.

여성들은 패물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내놓고 한글로 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 여성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나섰다.

남녀차별 인식이 팽배하던 당시 여성들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남녀구별이 있을 수 없다면서 과감하게 국채보상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사회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당시 여성들의 인식을 바뀌게 하는 큰 계기가 됐다.
국채보상단연회 의연금 모금장부.
다음날인 2월 24일 서문시장에서 영세상인들이 국채보상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이것을 본 학자들이나 부자들도 서로 부끄러워하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대구에서 발생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자 전 국민이 이에 호응했다.

언론사들은 신문 사내에 국채보상금 모금처를 설치하는 등 전파속도를 가속화 시켰다.

신문지면을 통해 참여를 촉구하는 것은 물론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의 취지서와 의연금 납부자 명단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으로 알렸다.

1907년 2월 서울에서 전국조직으로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됐고 전국 각지에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수많은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이어 서울에서 국채보상중앙의무사가 설립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며 수전소는 황성신문사로 정했다.

전국 각 지방에서도 국채보상회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했으며 전국에 27개소의 보상소가 설립됐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전국에서 송금해오는 의연금을 접수하는 중앙조직으로 인정받아 국채보상연합회의소로 체제를 바꿨다.

같은해 3월 9일 대구·경북지역도 더욱 모금 운동에 활성화 시키기 위해 대구민의소가 대구 서문 밖 수창사에서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고 국채보상의연금을 모금했다.

또한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가 결성되는 등 더욱더 모금에 박차를 가했다.

경북국채보상도총회는 엄격한 규정에 따라 운영됐으며 국채보상단연금 모집 연설회를 개최, 일반인이 각기 몇 10원 혹은 몇 10전을 의무적으로 기부했다.

1907년 4월 1일 국채보상운동을 효율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국채보상기성회 사무소인 전동에 있는 보성관에서 국채보상 전국연합운동의 제1회 임시회합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국채보상금 수합기구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로 이원화됐다.
이원화가 자칫 문제를 발생시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 협의를 통해 결과국채보상연합회의소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업무와 권장업무를 총괄하기로 하기로 했다.

여기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는 의연금을 수합하고 관리하는 일을 전담했다.

이 과정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국채보상운동 지역별 참여현황은 경기도가 7만 7천여 명으로 가장 많고 충남, 경북, 경남, 황해도 순으로 2만 명을 넘는 의연자를 가지고 있다.

지역별은 물론 국채보상운동은 고관·양반·재벌은 물론 노동자·농민·상인·군인·학생·부녀자·기생·승려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성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와 반지 등 귀금속을 내놓았다.

일본 유학생들과 미주와 러시아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고 일부 외국인들도 감동을 받아 참여했다.

광무황제인 고종과 정부각료들도 금연하고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는 등 확산 속도가 빨랐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모금이 시작된 지 3개월 후 모금액이 20만 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채보상을 위한 일련의 활동은 일본경찰의 방해와 탄압으로 시련을 겪으면서 1907년 말부터 모금이 부진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확산 되자 이를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구의 지도부에 압력을 가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인 중심기관이었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됐던 대한매일신보도 탄압을 받았다.

대한매일신보사 발행인인 영국인 배설은 처벌당하고 결국 추방됐다.

일반 국민들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국채보상금 횡령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림에 따라 국채보상운동 지도부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열기가 식고 말았다.

비록 일제의 방해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적 도의를 다하려는 시민, 공동체적 기부문화의 초석, 제국주의적 금융침탈에 대응하는 평화운동 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김현목 기자
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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