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와 80년대 까지만 해도 현장을 누비며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현장연구가의 수가 적었다. 이에 비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그 지역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갖고 유적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왕릉이나 암각화 등 특별한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라문화동인회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서 현장탐방과 연구를 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문화 일반이나 문화재 등에 식견을 갖춘 ‘향토사학자’들이 현장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연구성과들을 종종 내놓기도 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 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정식 학위를 가진 교수, 역사박물관이나 문화재연구소 등 국공립기관 연구원들이 논문이나 보고서로 내놓아야만 인정하는 경향이었다. 이 때문에 밤새 연구한 향토 연구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여러 종류의 토용(土俑·흙으로 빚은 인물상)이 쏟아져 나온 경주 용강동 고분의 경우도 이런 경우였다. 이 왕릉은 윗부분이 무너져 내려 왕릉인지 흙 언덕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봉분 가에는 주민들이 온통 쓰레기를 내다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개무덤’이라거나 ‘고려장터’라 불렀다. 1986년 향토사학자들이 이곳은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신라시대 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학계에 알렸다.

이렇게 해서 경주고적발굴조사단(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이 그 해 6월 개토제를 올리고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봉분 내부 조사에서 토용, 토마(土馬), 청동십이지상 토기 등 여러 유물이 발견됐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돌방 가운데 놓인 시상(屍床)을 향해 줄지어 있던 인물상들이었다. 머리에 복두를 쓰고 홀(笏)을 잡은 문인상, 대련 장면을 담은 무인상,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여인상 등 총 28점이었다. 이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서역인으로 보이는 수염 기른 문인상이었다.

연구결과 이 무덤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용강동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 문인상이 이란 수도 테헤란국립박물관에서 5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전시된다. ‘한-이란 수교 55주년’기념 문화교류 행사로 열리는 전시회에 1200여 년 전 통일신라 시대 서역인상이 그의 고향 페르시아로 나들이 간 것이다.

이동욱 편집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