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를 되돌아보며 쪽빛 파도의 길에 오르다

▲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
화진해수욕장을 뒤로하고 국도변으로 올라선다. 씽씽 내달리는 차들의 속도감에 떠밀리기라도 하듯 갓길로 바짝 붙어 선다. 트레킹 코스에서 피하고 싶은 곳이 찻길이다. 특히 국도는 교통량이 많아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다행이다. 바로 저 앞에 해안으로 들어서는 표지판이 보인다. 백공작이라고 불리는 미국쑥부쟁이가 하얗게 피어 발목을 덮는다. 내 딛는 걸음마다 깊고 그윽한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파도 소리를 길벗 삼아 가파른 계단을 내려선다. 왼쪽으로는 해송 숲을,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구불구불 돌아나가는 오솔길이 고요하다. 바닷가 몽돌밭이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며 돌 굴리는 소리에 두 귀를 기울인다. 또르르 도르르. 한쪽에선 물고기 형상을 한 바윗돌이 일제히 파도를 가르며 헤엄쳐 들어갈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 앞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한다.
지경항
지경길
신기한 풍경을 뒤로하고 바위산 하나 넘어서니 빨간 등대가 서 있는 지경항이다. 하늘빛도 물빛도 파랗다. 파랑과 빨강, 색조의 대비가 아름다운 항구다. 지경길 방죽을 따라 벽화에도 온통 하늘빛을 풀어놓은 듯 파란 물감을 쏟아 부었다. 어느새 길손의 마음에까지 파랗게 물이 들어서 지경교로 올라선다. 지경은 포항시의 북쪽 경계로 지경천(地境川)을 사이에 두고 영덕군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다리 건너에는 영덕군으로 들어서는 초입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기다리고 있다.
▲ 영덕 블루로드
아름다운 길을 품고 있는 부경리
“W E L C O M E TO B L U E R O A D”

‘쪽빛 파도의 길’이란 부재가 붙은 영덕 블루로드 D코스가 시작되고 있다. 영덕군 남정면 부경리는 영덕의 남쪽 끝 마을이다. 쪽빛 하늘 아래 길 양옆으로 흰색의 실선과 푸른색 실선이 나란히 붙어 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다. 흰색이 파도라면 푸른색은 바다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짐작을 해 본다. 특별한 길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다시 국도변으로 올라선다.

저기 바닷가에 회색빛 배 한 척이 보인다. 쪽빛 바다에 무겁게 가라앉은 저 배는 무슨 배 일까. 7번 국도를 따라 1km쯤 올라왔을까. 장사해수욕장 한쪽에 붙박아놓은, 좀 전에 봤던 그 배다. 저 배가 장사상륙작전 때 고지를 눈앞에 두고 태풍으로 침몰했다는 문산호의 모형이란다. 개관 예정이 2018년 중이라는 표시판 앞에서 아쉽지만 발길을 돌린다.
장사상륙작전 위령탑
장사상륙작전 문산호의 모형
문산호 모형을 앞에 두고 위령탑이 서 있다. 벽면에는 작전에 참전했던 용사의 명단이 화인(火印)처럼 박혀있다. 또 한 쪽 면에는 그때의 정황을 요약한 내용이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장사상륙작전은 실제 상륙지인 서해안 인천의 반대편에 있는 동해안 장사리에 기습 상륙, 적으로 하여금 상륙 지역을 오판하도록 함이었다. 적들의 주의를 동해안 지역으로 집중시키고,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의 전진로를 개척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한다.

미군 군사 전문가들조차도 성공 확률 5,000분의1로 점치며 만류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케 만든 장사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영덕군에서는 지금 한창 장사해변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는 장사상륙작전 재평가를 통하여 그분들의 충혼이 후세에 널리 기려지도록 교육의 장으로 활용함이다.

우거진 솔숲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장사리 앞바다에 따스한 가을빛이 내려앉고 있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갈매기 떼가 비상을 하는 장사해변을 돌아보며 다시 또 국도변으로 올라선다. 장사리의 북쪽 경계인 장사교를 앞에 두고 바다 쪽 언덕길을 내려선다.
장사해수욕장을 옆에 끼고 있는 부흥 해수욕장
신비감에 빠져들게하는 부흥천 물빛
부흥리로 넘어가는 초입이다. 부흥해수욕장에는 관광객을 대신하여 갈매기 떼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다. 장사굴다리, 부흥교, 장사굴다리가 부흥천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으로 걸쳐있다. 굴다리 벽화가 길손을 유혹한다. 바다 속 아름다운 물고기 그림이다. 생김새가 낯선 물고기도 있다. 어느 화가가 상상의 물고기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일까. 오고가는 차들을 피해 갓길로 붙어 선다. 눈길은 벽화에 두고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물 맑은 바다를 정원으로 두고 있는 어촌이다.
굴다리 벽화
동해연수원(경운대학교, 대구과학대학)을 좌측에 두고 해안 오솔길로 들어선다. 해풍에 허리라도 꺾일 새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핀 연보랏빛 해국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소나무 그늘 아래, 켜켜이 바위틈에, 깎아지른 절벽에 바짝 붙어 핀, 온통 해국 천지다. 바다, 해국, 바위, 소나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가로이 걷고 싶은 오솔길이다. 가을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길을 두고 다시 또 국도로 올라선다.
원척리
동신제
데크길, 그리고 원척리로 내려선다. 여러 색깔의 지붕을 이고 있는 동화 속 그림 같은 마을이다. 마을 한 복판에 잿빛 기와를 이고 있는 동신제(洞神祭)다. 처마 끝에 걸린 금줄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며 지붕 낮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깊은 골목길이 고불고불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푸른 블루로드 안내표지가 보였다가, 또 금세 해파랑길 붉은 띠가 보인다. 도란도란 앉아 있는 마을이 끝나자 개울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정겹다. 묵정밭, 풀숲, 영덕수산 간판을 바라보며 국도로 올라선다.
국도변에 데크길
방학중 이야기
북쪽으로 올라가는 대로변에 긴 데크길이다. 도로변에 ‘천하잡보 방학중 이야기’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방학중은 근세의 해학과 풍자의 달인으로 구비 역사에 남아 전하는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다. 기발한 재주꾼에 유머가 넘치는 그를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바람도 푸른색일 것만 같은 날이다. 자전거길, 블루로드, 그리고 해파랑길, 길손이 함께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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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이순화 시인

차도를 벗어나 바다 쪽, 가파른 계단을 내려선다. 잔잔한 바다를 발밑에 둔 소나무 숲, 여기에도 해국이 만개를 했다. 솔향기에 취하고 국화 향기에 취해 걷다보니 다시 또 차들이 쌩쌩 달리는 7번 국도다. 북쪽으로 구계항이 보인다. 빨강, 하양, 등대가 세 개나 서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항구다. 옛날에는 조그마한 어촌에 작은 항구였다고 한다. 지금은 국가 항으로 지정되어 많은 배들이 드나들며 주위에는 횟집들과 펜션, 카페가 눈길을 끈다.

△2015년 소비자 선정 최고의 브랜드 대상을 받은 영덕블루로드는 D-A-B-C 순서로 4개의 코스가 있다. 이 중 가장 마지막에 조성된 D코스의 일부가 해파랑길 19코스와 겹쳐지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바다로 난 해파랑길
솔향기 짙은 해안 오솔길
▲ 구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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