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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법학박사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시민단체들에 기생해서 혁명적 수준의 계급투쟁을 사생결단으로 전개했던 여당은 정권교체 이외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오로지 적폐청산만 외치고 있다.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자들 마냥 구체제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초조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목표는 점점 더 과거에 몰입되고 있다. 문재인의 공화주의는 왜 과거로만 회귀하는가? 과거 정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중용은 중단할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이 등을 돌리고 봉기하면 지지층을 잃게 될 테니까! 그들에게 지지를 받아야 내부적 평화를 보장받게 되니까! 이런 정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인적인 인내와 이해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 강역(疆域)의 모든 신민을 계몽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만일 청산에 실패하면 반동들에 미혹(迷惑)될 것이라 엄포를 놓은 저들을 보라. 자신들의 최대 무기라고 호언했던 도덕률도 전리품을 나누는 고관의 임명에서 보았듯이 이미 온데간데없다. 몇 명이 낙마했는가? 홍 씨의 낙점은 화룡점정이다. 이제 우리는 부가된 분노 이외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좌파는 광포한 우익에 경악했다고 하나 본디 그쪽이 더 포악하거늘 어찌 감히 이쪽을 농단하려 드는지! 광화문대로 엄동설한 밤거리의 계급투쟁에 대해 한국 민주주의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어느 누구도 분명하고도 단호한 반격능력은 없었다. 과연 어느 누가 촛불의 슬로건에 현혹당하지 않은 현실의 지략가였던가?

보수여 묻는다. 광화문 포도 위의 시민들이 ‘촛불은 살아있는 양심’이라고 미화할 때 그들을 향해 “권력탈취를 발톱처럼 숨긴 선동이요! 사악한 권력욕에 마취된 황홀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왜 반박하지 못했던가?”

촛불의 위협에 패퇴한 보수는 기존질서를 절대 쉽게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온갖 외교적 착종(錯綜)과 순간적 책략에도 불구하고 세력균형의 복구는 현재로써는 불가능하다.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정치기술도 없고 배면 엄호를 받았던 영남 사림들마저도 등을 돌렸다. 안으로 충만하게 되는 반성도 없으니 당연히 밖으로 반동의 몸짓도 없다. 지금의 여당은 열정적인 혁명가들이었다. 손에 촛불을 들고 자신의 군주에 대해 투쟁했던 자들이다. 반면 보수는 군주를 위해 그 누구도 목숨을 희생할 의향이 없었던 나약한 오합지졸의 친위대 몇 명뿐이었다. 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정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며 패잔병들은 포로가 되었고 문재인의 공화국은 승리했다.

봉기는 몇몇 시민단체의 촛불시위에서 시작했으나 이내 경찰은 사라졌고 광장의 곳곳에 붉은 불빛이 자유롭게 활보했으며 혁명의 해방구가 되었다. 모두 생동하는 광화문의 혁명적 분위기에 도취되어 촛불 앞에 우파마저도 온건하고 평화로운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으며 일부는 아예 당을 나갔다. 전 정권이 촛불에 함락되어 어떠한 반동도 없이 맥도 추지 못했으며 끝장나고 붕괴되어 버렸다. 대혁명은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 그것은 마치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 톨스토이가 부활해서 우리를 전에 호메로스의 신(神)들이 트로이의 성벽 아래서 영웅들이 싸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저 올림퍼스 산정(山頂)으로 날라다 주는 것과 같다. 자기의 운명을 파도에 맡겨버린 보수는 물결 따라 휩쓸려 갈 운명이다. 당연지사다. 마키아벨리가 갈파한 대로 보수는 그들이 죽은 후에 부관참시 될 운명도 모르고 명석한 지성으로 눈앞의 먹이만 집착하고 머리 위의 독수리를 몰라본다. 아이러니다.

한국의 보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시진핑 발전관과 같은 체계도 없다. 보수에게 묻는다. 여기의 등장인물에 누구를 등치시킬 것인가? 노예가 주인한테 대들지 않음으로써 매를 맞지 않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일방이 타방의 힘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 것 혹은 상대의 악행을 눈감아 줌으로써 유지되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내 문장은 끝없는 착오로 아름답지도 않고 사고력도 없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배양된 영지(靈地)의 과일도 아니다. 다시 묻는다. 보수여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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