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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우리가 괴물을 키웠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청와대 전(前)주인과 그의 수하들을 두고 누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잡한 심사가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그렇게 좋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괴물 운운 하는 세태가 야속하기 그지없습니다. 괜한 반발심이 들어 속으로 이렇게 반박해 봅니다.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괴물이란 것은 없습니다”라고요.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역설적인 우스개 논리 하나를 개발해 보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괴물이기에 우리 누구도 남을 괴물이랄 수 없다”라는 궤변입니다.

꼭 정치판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괴물(怪物·monster)이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누군가를 증오하고 원망할 때면 이미 괴물입니다. 다른 이치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상대의 잘못만 탓합니다. “귀신은 도대체 뭘 하나”라며 상대가 잘못되기를 빕니다. 그런 괴물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저도 그런 괴물이 되어 본 적이 있어서 잘 압니다. 또 젊은 사람 입장에서는 저 같은 늙은이들은 모두 괴물입니다. 세상이 크게 바뀐 줄도 모르고 옛날 기준으로 젊은 사람들을 평가하고 틈만 나면 가르치려고 드는 늙은이들이 괴물이 아니면 세상에 괴물이랄 것도 없다고 젊은이들은 생각합니다. 저도 옛날에 한 번 젊어 봐서 잘 압니다. 그런 식으로, 며느리가 보는 시어머니는 늘 괴물입니다. 그 역도 진(眞)이고요. 사는 게 그렇다 보니 어릴 때 친구를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일은 항상 가슴 조마조마한 일입니다. 최소한 누구 하나는 괴물이 되어 있을 공산이 큽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십 년 인생에 복무(服務)하면서 얻은 교훈, 혹은 지혜, 혹은 환멸의 결과입니다.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한 친구라면 십중팔구는 그 친구 아니면 제가 괴물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괴물이 되어 있는 경우는 아마 이런 것일 겁니다. 고집불통 완고한 시골 늙은이의 아집(我執),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독선주의자의 오만(傲慢), 혼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투의 과대망상 혹은 피해망상, 무언가 열심히 이루며 살아왔다는 소시민적 자만(自慢), 누구든 가르치려 드는 선생 근성, 위장된 도덕주의자의 공연한 투정과 그로 인한 차단감 또는 불통감, 아마 그런 것들이 저를 괴물로 보이게 할 겁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높은 자리에도 한 번 올라보고,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살아온 친구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눈에 거슬리지 싶습니다. 저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적 옛 친구가, 그 어릴 때의 순수성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돈이나 권력의 화신, 오직 속악(俗惡)의 화신으로만 제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괴물로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들으면 영락없는 미친 소리지만, 서양사의 최고 지성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 최초의 괴물로 여성을 지목했습니다. 그는 ‘동물의 발생(The Generation of Animals)’에서 남성 모형에 기초한 신체구조의 관점에서 인간의 규범을 가정합니다. 생식에서 모든 일이 표준에 따라 진행된다면 남자아이가 생기고, 생식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거나 일어나지 않았을 때만 여자아이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남성 중심의 인류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변칙이고 변종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성은 합리적 정신을 부여받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케케묵은 말씀까지 드리는 이유는 다 아시다시피 다음과 같습니다. 괴물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다는 것, 우리 모두는 다 괴물이라는 것, 그래서 밖에서 괴물을 찾아서는 안 되고 내 안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 “괴물, 괴물” 하는 사람이 괴물일 때가 많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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