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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병일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36년간 우리 국민에게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주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 대전회통 등 성문법령과 당률, 명률로 적용받던 우리 국민에게 일제는 근대적 법령을 적용한다는 미명으로 조선민사령과 제령을 제정하여 일본 민법, 상법을 비롯한 각종 일본 법령을 적용하였다. 일제는 36년간 온갖 법령을 제정하여 우리 국민을 억압하였고, 심지어 1940년에 이르러서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창씨 개명까지 꾀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우리의 말과 얼을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년간 미 군정으로 있는 동안에도 미군은 우리 법률을 전혀 새롭게 입법하지 않았고, 1945년 11월 2일 미군정청 법령 제21호에 의해서 ‘일제의 모든 법령(일부 폐지된 것은 제외)은 계속하여 효력을 가진다’고 하였다. 해방된 공간에서 미군은 우리 국민에게 일제의 법령을 계속하여 적용하면서 지배하였다. 1948년 7월 17일에 우리의 손으로 만든 제헌 헌법 제100조에서도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여, 일제의 민법과 형법 등 법령이 계속하여 우리 국민에게 적용되도록 헌법상 근거 조항을 신설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된 공간에서 제대로 힘을 가지지 못한 우리 국민으로서는 방대한 입법을 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률인 형법은 6·25전쟁 이후 1953년 9월 18일에 제정되어, 형사소송법은 1954년 9월 23일에 제정되어, 겨우 우리 손으로 만든 법률에 의해 우리 국민을 처벌하게 되었다. 국민의 재산과 가족에 관한 중요한 법률인 민법은 1958년 2월 22일에 제정되어, 민사소송법은 1960년 4월 4일에 제정되어, 민법은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은 이같이 국민 생활에 가장 중요한 몇 개의 법률 제정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보다 더 많은 중요한 법률은 제정하지도 못한 채 자유당을 거쳐 민주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은 계속하여 일제 법령의 적용을 받았다. 이처럼 해방 이후 일제의 법률적 잔재는 1960년까지 남아있었고, 16년간 일제의 법령이 우리 민족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자유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은 국민 생활을 규율하고,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법령의 존재가치를 몰랐을까 궁금하다.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시험에 합격하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과 행정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일본 법률을 공부하던 그 많은 분은 우리나라 법률이 아닌 일제 법률을 공부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왜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6·25전쟁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난 뒤에는 왜 우리 법률을 입법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일제의 잔재를 이승만정권이 청산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고, 국민의 생활을 온통 규율하는 법령을 일제의 법령으로 통치하였다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난 이후, 5월 19일에 구성되어 1963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하면서 1천300개의 내각령을 만들고 725개의 법률을 제정한 국가최고통치기관으로서 입법부기능도 하였다. 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1961년 7월 15일에 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1948년 7월 16일 이전에 시행된 법령으로서 헌법 제100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 효력이 존속되고 있는 법령을 1961년 12월 31일까지 정리하여 이를 헌법의 규정에 의한 법률 또는 명령으로 대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1961년 12월 31일까지 정리되지 아니한 구법령은 1962년 1월 20일로써 폐지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여 일제의 법령을 우리나라에서 싹 없애 버리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725개의 법률을 우리 말과 글로서 제정하였다.

오늘 2017년 11월 14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서 한 삶에 대한 평가가 찬반으로 극명하게 갈리는 사람도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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