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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의 추억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등록일 2017년11월14일 16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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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결혼해서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살았습니다. 큰 이사만 해도 열 번은 족히 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옛날 제가 다닌 고등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교도 먼 곳으로 옮겼고 주변 풍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몇 개의 골목길은 여전히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카페가 들어서고 예전 주택가의 고즈넉한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추억의 장소가 되기에는 아직도 충분한 자태입니다. 저는 저녁 산책길로 이 골목길들을 애용합니다. 저녁 어둠이 한 자락 조용히 내려앉기 시작하는 이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곳이 기억하고 있는 학창 생활의 희로애락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가 반갑게 뛰쳐나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일생의 기초를 다진 곳이 바로 이 골목길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차 한 대 지나가기도 힘든 좁디좁은 골목길을 걸어 다니면서 제가 한 수많은 생각과 후회와 각오들을 한데 모을 수 있다면 모르긴 해도 트럭 한 대 분은 족히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지금은 후회나 각오 대신에 회고와 반성을 주로 합니다. 골목길이 그것을 권합니다. 요즘 하는 생각은 주로 “빌린 복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입니다. 젊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좀 들고나니 그동안 제가 누린 행운이 모두 남에게서 빌린 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추려 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가세가 많이 기울어서 등록금 마련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는 라이언즈 장학금으로, 고등학교 때는 종친회 장학금으로 무사히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번의 기회를 만들어준 사람은 가형(家兄)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을 찾아뵙고 납부 기한 연장을 부탁드린 것도 가형이었고(장학금이 기탁되자 교장 선생님이 저를 수혜자로 지목했습니다), 신문에 난 종친회 장학생 모집 광고를 찾은 것도 가형이었습니다. 모두 가형의 복을 빌린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앞두었을 때였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출제진 교수님의 저서를 빌렸습니다. 그때는 복사기가 없던 때라 중요한 부분들은 모두 칼로 도려내어 가져갔습니다. 남은 것은 책 표지 목차, 그리고 그동안 출제되지 않았던 곳 몇 장뿐이었습니다. 다 보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문제가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곳만 집중적으로 보게 한 선배, 동료들의 복을 제가 빌린 것이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관학교 교관 시험을 쳤는데 아쉽게 떨어졌습니다. 한 명 뽑는데 전국에서 열한 명이 지원했고 제가 2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합격통지가 왔습니다. 언제까지 보병학교로 입교해서 장교 임관 교육을 받으라는 거였습니다. 들어가 보니 합격자가 세 명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복을 제게 왕창 빌려준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그랬습니다. 10년 전쯤 직장 내(內)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선만 되면 역사에 길이 남을 공복(公僕)으로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다행히(?) 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절치부심(切齒腐心), 한눈팔지 않고 글만 써서 열 권 정도의 책을 냈습니다. 읽을 게 좀 있다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모두 직장 동료들의 복을 제가 빌려 쓴 것입니다. 다른 것도 많이 있습니다만 지면 관계상 이만 줄이겠습니다. 특히 결혼해서 아내에게 빌린 복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후일을 기약하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추사 김정희의 ‘유재(留齋)’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이상 만추(晩秋)를 맞이한 골목길의 추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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