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위기때마다 창의의 기치 높이 들고 조국 수호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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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 중앙에 위치한 의성읍은 1914년 북부면과 남부면을 병합하고, 1940년 읍으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른다.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대구, 안동간의 국도와 영양, 청송으로 통하는 문호로써 버스 노선도 발달돼 있다.

의성은 예로부터 오토의 영산 아래 충의열사와 효자, 열부가 줄을 이어 태어났고 성주가 순국해 의로운 고을 즉 의성(義城)이라 명명한 국은이 있는가 하면 임진, 병자의 병화가 있을 적마다 충용한 우리 의성의 선인들은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 비참한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조국수호의 기록을 남겼었다.

충열사(忠烈祠) 및 홍술장군 순절비(洪術將軍 殉節碑)
△ 충열사(忠烈祠) 및 홍술장군 순절비(洪術將軍 殉節碑)

의성여자중학교 뒤 사당골에 위치해 있고 의성김씨(義城金氏)들이 매년 춘향(春享)을 치른다. 조선 숙종 때 읍민들이 홍술(洪術) 장군을 제향(祭享)하기 위해 사당(祠堂)을 이룩하고 그 앞에 순절비(殉節碑)도 세웠다. 고려의 개국 공신인 홍술장군은 929년(고려태조 12년, 신라 경순왕 3년) 7월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정예군 사 5천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해 왔을 적에 이를 맞아 힘껏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태조는 그의 순사(殉死)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이곳을 ‘의(義)로운 성(城)’곧 의성이라 명명(命名)했다고 전해진다.

▲ 소원정(溯源亭)
△ 소원정(溯源亭)

의성읍 도서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숙종때 오천송(吳千松)을 추모하기 위해여 건립했으며 이때는 기양정(岐陽亭)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 후 소실됐으나 1913년경에 재건했다.

정만록(征蠻錄)
△ 정만록(征蠻錄) (보물 제880호)

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1541∼1610)의 일기로 건(乾)·곤(坤)의 순서를 단 2권 2책으로 돼 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였던 김수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전쟁의 여러 전술을 건의해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됐다.

이것은 1592∼1598년까지의 일기로 건권은 표지 뒷면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 이하 여러 관리들의 좌목(座目: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날그날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다만 임진기사는 날마다 기록했고, 1593년에서 1598년까지는 연월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만 적었다.

곤권은 임진왜란의 시작과 하루하루의 기록, 통문 등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시작해 그해 연말까지는 약 10일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혀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정만록’이라는 책 이름이 선조임금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진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보관 중이다.

의성향교
△ 의성향교 (지방유형문화재 제150호)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조선 태조 3년(1394)에 세워졌다고 전하며 인종 1년(1545)에 수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건축되었음이 확실하다.

대성전과 명륜당이 서로 다른 토담속에 남향으로 배치돼 제사공간이 앞에 있고 학습공간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의 전형에서는 벗어난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다.

의성치선동석탑
△ 의성치선동석탑 (경상북도문화재자료 30호)

선암사 뒤편에 서 있는 석탑으로, 일부만 남아 있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고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특히 1층 몸돌 4면에는 연꽃받침 위에 앉은 부처의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인데, 3층 지붕돌이 많이 훼손돼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기단의 한 부분으로 보이는 돌 하나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고, 1층 몸돌의 불상 조각이 많이 닳아있어 화려하거나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신라 무열왕 때 세웠다고 전하나, 탑의 양식과 불상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인 9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 도서리 회나무

△ 의성 도서리 회나무 (경상북도기념물 2호)

회화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나무로, 중국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주로 마을 가까운 곳에 심어져 왔다. 회화나무가 들어온 시기는 ‘삼국사기’,‘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회화나무에 관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이라고 추정된다. 꽃은 8월에 황백색으로 피며 열매는 10월에 익는데, 꽃과 열매 모두 약용으로 쓰인다.

의성읍 도서리 도로변에서 자라고 있는 도서동의 회화나무는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8m, 둘레는 10m이다. 가지가 지상 3m에서 3갈래로 갈라져 중앙의 가지는 말라죽고 동서쪽 가지만 살아있으며, 밑동 부분은 썩어서 큰 구멍이 나 있다.

이 회화나무는 1919년에 간행된 ‘노거수명목지’에는 남북한을 통틀어 둘레가 가장 큰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1972년의 기록에서도 전국에서 지정된 360건의 회화나무 중 가장 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도서동의 회화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이며, 회화나무 중에서 둘레가 매우 크고 높은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의성읍 항공촬영 사진
△ 의성읍 출신 인물

의성읍 출신 인물로는 제8대 국민대 총장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한 김문환 이사장,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유한양행 대표이사와 한국제역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한 김윤섭 대표가 있다.

또 제9대 국회의원을 지낸 경제인 겸 언론인인 김충수 회장, 대법원 대법관을 역임한 이용우 대법관, 정덕흥 변호사, 제37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고 한국사회복지협의회와 세계노년학회장을 지낸 차흥봉 회장, 홍기표 우신공업 대표이사, 제2대 부산지방검찰청 황의수 서부지청장, 황하수 전 통일부 남북회담 본부장 등 그 밖에도 법조계와 학계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의성읍 출신 인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원용길 기자
원용길 기자 wyg@kyongbuk.com

청송·의성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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