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경’에 묻힌 권력투쟁 피비린내와 소헌왕후의 눈물

청송 찬경루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에 있다. 1428년(세종 10년) 청송부사 하담이 경치가 빼어난 용전천 절벽 위에 지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4칸 구조인데 세종의 여덟 아들이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를 위해 두 칸씩 지었다고도 한다.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 8남 2녀를 두었다. 첩첩산중 시골마을은 소헌왕후 덕에 세종 즉위년인 1418년 청부군으로 승격됐다가 1423년 청송군이 됐고 소헌왕후의 아들인 세조대에 와서는 청송도호부로 승격됐다.

청송 찬경루 讚慶樓 내부
찬경루에서 내려다본 용전천.
찬경루기문은 당시 관찰사인 홍여방이 썼다. 홍여방의 기문은 청송심씨와 소헌왕후에 대한 ‘용비어천가’다. “소나무 잣나무는 울울창창하고, 안개와 노을은 어둠침침하게 잠겨 있어서 맑고 그윽한 한 동학(洞壑)이 의젓한 선경(仙境)인 듯한 곳이 곧 청송(靑松)이었다. 군수 하담(河澹) 군은 유림의 친구이다. 나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은 왕후의 본향(本鄕)이므로 일찍이 현(縣)을 올려서 군(郡)으로 하였으나 땅이 궁벽함으로 하여 사신(使臣)의 오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관사(館舍)가 갖추어지지 못하였더니, 지난 해에 처음으로 한가한 무리들을 모집하여 청당과 이 누각을 세웠습니다. 원하건대 이름을 짓고 기(記)를 써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물과 산의 영이(靈異)한 것은 반드시 그 상서를 낳는 것이며, 조종의 선덕을 누적한 자는 반드시 그 경사를 남기는 것이다. 청원 시중공의 선대에서는 산과 물에서 빼어난 기운을 나누어 받고, 삼한에 인후함을 심어서, 그 근본을 배양하고 그 정기와 영화를 배어 길렀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소헌왕후의 곤덕(坤德·왕후의 덕)과 어머니로서의 의표와, 금지옥엽(金枝玉葉)인 그의 후손들은 우리 조선 억만세의 끝 없는 복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 누에 올라 그 옛터를 바라보니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찬경루라고 명명한다.”

찬경루 앞 섶다리. 찬경루에서 청송심씨 시조묘에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다리라고 전한다.
찬경루는 청송심씨 소헌왕후의 시조묘가 있는 보광산을 우러러 찬미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홍여방이 ‘누에 올라 옛터를 바라보니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옛터는 보광산에 있는 소헌왕후의 시조인 심홍부의 묘소다. 용전천이 홍수로 범람해 심홍부의 묘소로 갈 수 없을 때는 찬경루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찬경루 앞에는 용전천에는 섶다리가 있는데 용전천 강물이 불어 청송심씨의 시조묘 전사일에 관원과 자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까 걱정해 소나무가지를 엮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송백강릉’ 현판.소헌왕후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썼으나 불에타 없어지고 뒷날 한철유가 본떠서 썼다.
찬경루 누각 안에 있는 ‘송백강릉(松柏岡陵)’ 현판 글씨는 소헌왕후의 아들 안평대군이 썼으나 뒷날 화재로 소실됐고 한철유가 1792년 안평대군의 글씨를 그대로 옮겨 썼다. 《시경》 〈소아천보〉의 “산과 같고 언덕과 같고 작은 언덕과 같고 큰 언덕과 같고 냇물이 바야흐로 이르는 것 같아서 복이 더해지지 않음이 없으리라(중략)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무성하듯이 자손이 이어지지 않음이 없으리라”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후 찬경루는 김종직, 서거정, 송시열 같은 대가들이 앞다투어 시를 짓거나 기문을 썼다. 누각 안에는 이외에도 이심원, 홍성미, 황효원, 한광근, 양극선, 신익선 등의 시편이 걸려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서거정 김종직 이심원의 시가 소개되고 있다.



온 종일 한가롭게 시 읊으며 기둥에 기대니,

선현들의 싯구가 모두 노조린을 앞서는 구나.

두 산이 좁게 뻗쳤기에 땅 없을까 의심했더니,

한 가닥 오솔길이 가만히 조그맣게 있는 동천(洞天)으로 통하였네.

청부(靑鳧)를 찾고자 하나 이제는 볼 수 없는데,

한가롭게 백조를 보니 참으로 사랑할 만하다.

이곳에도 반드시 봉래산이 있을 것이니,

단구가 아니더라도 신선이 되어 갈 수 있으리라.

-서거정의 시 ‘찬경루’




찬경루에는 비밀코드가 숨겨져 있다. 권력투쟁의 피비린내는 ‘찬경’에 묻혔다. 소헌왕후의 인생곡절이 녹아 있다. 권력투쟁의 음모와 음모에 숨죽이며 울음을 삶켜야 했던 조선 여인의 한이 배어 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沈溫·1375~1418)은 영문도 모른 채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사정은 이렇다. 1418년 9월 2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영의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심온은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에 임명된 심온은 다음날 명나라에 사은사로 떠나게 된다. 그가 떠날 때 사대부들이 앞다퉈 전송했다. 새로운 권력자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수레와 말이 도성을 뒤덮을 정도였다. 이 소문을 들은 태종은 다시 외척이 득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죽인 처남 민무구나 민무질을 떠올렸다. 왕실의 앞날을 위해 대책을 세워야 했다.



태종은 ‘강상인옥사’에 심온을 엮어넣기로 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군대는 자신이 맡고 국가 중대사에도 자신이 개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태종의 심복인 강상인이 군사문제를 세종에게 직접 보고했다. 태종은 ‘태종과 세종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죄목을 걸어 강상인을 찢어 죽였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병조의 군부에 있다는 점에 착안해 심정과 강상인을 연루시키고 다시 심정과 심온을 연결시켜 심온을 강상인 사건의 주모자로 만들었다. 여러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고 죽었다. 그해 12월 5일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은 의주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돼 칼을 쓰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전인 딸과 살아남은 가족들을 위해 불러주는 죄를 모두 뒤집어 쓰고 자살했다. 심온의 재산은 몰수됐고 아내와 딸은 관비가 됐다. 이 와중에 세종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소헌왕후는 태종이 살아 있는 동안은 늘 불안했다. 아버지가 죽기 한달 전에 정식왕비로 책봉됐으나 역적의 딸을 폐서인해야 한다는 중론에 고통을 겪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관비로 떨어진 어머니와 형제 생각, 처가 문제에 무심한 남편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한시도 편한 날없이 고통 속에 지냈다.

찬경루와 운봉관 뒤에 있는 조선 목민관의 선정비
1422년 태종이 죽었고 2년 뒤 하담이 소헌왕후의 본향인 청송에 찬경루를 지었다. 하담의 아들은 세조때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하위지다. 관찰사 홍여방은 찬경루에서 강 건너 보이는 청송심씨 시조묘를 향해 ‘우러러 찬미한다’는 뜻으로 편액이름을 찬경루라고 지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글을 썼다. 아들 안평대군은 ‘송백강릉’ 현판글씨를 썼다. 왕의 명으로 찬경루를 지었다면 소헌왕후를 위로하겠다는 세종의 뜻이 담겼을지도 모른다.



찬경루를 지은 뒤 청송심씨 집안이 잘 풀렸다. 세종 말년에 심온은 복위됐고 소헌왕후가 낳은 첫아들(문종)과 둘째 (세조)는 왕이 됐다. 소헌왕후가 왕비에 책봉되던 해 아버지 심온이 역모에 몰려 죽었다. 그해에 아우 심회가 태어났다. 심회는 세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심온에 이어 부자간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심온의 아우 심종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결혼해 청원군에 봉해졌다. 심연원은 명종때 영의정을 지냈고 심강은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아버지다.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산수화의 거목 심사정도 청송심씨다.

찬경루 뒤에 있는 청송관아의 객사인 운봉관
운봉관 현판
청송군은 청송이 소헌왕후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고장임을 알리기 위해 찬경루와 운봉관 섶다리 등을 한데 모아 ‘소헌공원’를 조성했다. 소헌공원의 백미는 찬경루다. 2층누각에 오르면 용전천이 내려다 보이고 용전천을 가로지르는 섶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 심씨 시조묘가 있는 보광산이 보인다.



나무 끝에 화려한 누각이 석양가에 서있어

올라 굽어보니 술잔도 잡기 전에 흥이 먼저 오른다

냇물이 돌아서 천 길 돌 계단을 잠가버리고
김동완.jpg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산이 둘렀기에 다른 한 조각 하늘을 훔쳐 본다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징조는 참으로 기록할 만하고

도원(桃源) 같은 이곳의 경치는 진실로 사랑할 만하여라

머리를 들어 웃으며 안개 속에 사는 손님에게 향하노니

소부(巢父)나 허유(許由)가 산중에 살았다고 하여

원래 반드시 신선은 아니었으리라.


- 김종직의 시 ‘청송찬경루를 차운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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