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간판, 앞으로도 유효할까?’, 며칠 전 한 신문의 헤드라인입니다. 예전에도 자주 듣던 말입니다. 저희 때도 대학 간판보다는 학과선택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대학간판 내세우다가는 기필코 패가망신한다”입니다. 일례로, 제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들어보겠습니다. 교수를 새로 뽑는데 일절 학벌을 보지 않습니다. 연구능력과 교수능력만 봅니다. 자교든 타교든, 최근 수년간 제가 본 대학인사에서 세칭 일류대학 출신이라는 것으로만 우대받는 경우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학벌만 믿고 연구를 게을리하거나 경력 관리에 소홀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탈락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정실인사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학벌파괴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었습니다. 일류대학에 한 번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허황된 믿음이 발붙일 땅은 아예 없어졌습니다. 수능 실력이 인생 실력이 되던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오늘 아침, 대학간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초유의 ‘수능 연기사태’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가짐이 크게 바뀔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앞으로는 자기밖에 모르는 ‘시험 잘 치는 로봇’보다는 인간을 잘 이해하고 공동체의 이익에 공헌하는 ‘사랑스런 광기’를 지닌 인간을 양성하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대수학자가 라신의 ‘이피제니’(‘정념의 비극’, 대표적인 라신 비극 작품)를 읽은 후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인가?”라고 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수학천재가 예술 바보가 된 예입니다. 그 반대도 물론 있습니다. 알피에리(이탈리아의 유명한 비극 작가)는 유클리드의 제4 정리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괴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색채론은 뉴턴과 달리 색채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양극적 대립현상으로 봅니다. 괴테에게는 가설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는 계산이나 측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과 관계를 직접 오성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참조).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들 바보 천재들의 ‘사랑스런 광기’가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스런 광기’를 사랑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