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감상) 낯선 도시에서 오후를 보낸다. 회색 머플러를 세트로 두른 한 쌍이 내 앞으로 왔다 사라진다. 양 손에 캐리어를 끄는 남자의 옆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그녀가 웃으면서 걷고 있다. 익숙한 풍경들이 낯선 도시에서 흘러간다. 나는 낯선 사람이 되려고 떨어져가는 단풍나무 옆에 파랗게 서 있다. 내가 단풍나무가 될 수 없다는 걸 나만 모르는 오후.(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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