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포격 훈련 중이던 미 공군 연습기의 오인포격으로 독도 인근에 조업 중이던 한국 어민 30여 명이 사망 혹은 실종됐다. 1951년 6월 위령비를 세웠다. 1953년 2월 27일 독도가 연습기지에서 풀렸다. 위령비는 1953년 일본 어민들에 의해 파괴돼 물속에 빠졌을 것이다.

정확한 명칭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대해 지난 2005년까지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러다 지난 2005년 3월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제막식 장면을 찍은 사진들이 공개됐다. 이 사진은 이승만 전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보관하고 있다가 며느리인 조혜자씨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조재천 당시 경북도지사를 비롯, 100여 명이 참석한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제막식에서 한국해군의 ‘조총(弔銃)의식’이 치러진 장면도 있다. 또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대장의 조부(祖父)이자, 고종황제로부터 “독도를 지키라”는 특명을 받고 188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독도로 이주해 왔던 홍재현(洪在現)옹이 당시 90세의 나이로 참석해 제막식 조사를 낭독하는 사진도 공개됐다.

사진이 공개되면서 당시 독도조난어민위령비 뒷면의 ‘취지문’도 공개됐다. “단기 4281년 6월 8일 독도에 출어 중이던 어민 59명이 18척의 배에 분승 조업 중 미군 연습기의 오인포격을 받아 사망 및 행방불명 14명, 중경상 6명, 선박파괴 4척의 일대 참사가 발생했다.…(하략) ”는 내용이었다.

사진이 공개된 이후 10년 만인 2015년 8월 운명적으로 경북일보 해양탐사팀에 의해 독도 인근 바닷속에서 이 비석의 실체가 확인돼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경북일보는 이 비석을 인양해 2015년 8월 28일자 창간기념호 1면의 전면에 해서체로 선명하게 ‘독도조난어민위령비(獨島遭難漁民慰慰靈碑)’라 새겨진 비문 사진을 광고면까지 헐어 그야말로 대서특필 했다.

비석의 염분 제거작업을 끝내고 경북도와 울릉군이 안용복기념관에 상설전시하기 위해 옮겼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1950년 이전부터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소중한 증거자료인 이 비석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전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구지방변호사회가 나서서 관람객이 많은 독도박물관에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이동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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