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회충보다 ‘간흡충’ 많아…"건강검진 대변검사 중요"

15일 오후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열린 JSA 귀순 북한 병사 2차 수술결과 및 환자 상태에 대한 브리핑에서 이국종 교수가 병사 배에서 나온 기생충 제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
귀순한 북한 병사를 구한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가 기자회견 당시 “소장에서 수십 마리의 기생충이 발견됐다”고 언급한 게 다시금 기생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정의당 김종대 의원이 귀순 병사의 기생충 발견 사실을 공개한 게 의료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고, 이에 의료계가 김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기생충에서 비롯된 논란은 일파만파로 커진 모양새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는 구충제를 복용한 뒤 대변에 섞여 나온 기생충을 마주한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가 들어 있다.

『 “워매, 요것이 뭐시다냐!”

막내 옆으로 다가서던 월하댁은 질겁을 하며 물러섰다.

큰 감만한 것, 그것은 회충의 덩어리였다. 희읍스름한 회충들은 서로 뒤엉켜 느리게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어찐가? 비암보담 더 무섭제?”

어머니도 놀란 것에 만족한 선진이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쌕 웃었다.

“워따, 시상에나 징허고 징해라. 저것이 다 니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여? 글 안 해도 잘 묵도 못하는 속에 저런 잡것들이 들앉어 진기럴 뽈아내니 항시 히놀놀해갖고 지대로 크기럴 허냐, 지대로 피기럴 허냐, 개잡녀러 것들!”

월하댁은 저주하듯 세차게 침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전국 규모의 기생충 감염률 조사와 투약이 이뤄지고 회충이 모습을 드러낸 60년대 이후 대다수 국민의 반응은 이랬다.

서울대의대 인문의학교실 연구팀(정준호, 박영진, 김옥주)이 지난해 대한의사학지에 발표한 논문(1960년대 한국의 회충 감염의 사회사)을 보면 조선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회충(蛔蟲)을 인간의 중심, 즉 몸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런 인식으로 사람들은 배가 아프면 성난 회충을 멸하는 대신 조용히 잠재울 방도를 찾았다.

이는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37년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회충을 토한 뒤 “회충은 사람과 함께하는 ‘인룡’이다. 천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몸속에 기생충이 창궐했던 이유는 한국인의 주식인 곡물과 채소에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암컷 회충 한마리의 산란수를 10만개로 쳤을 때 인분을 통해 전국의 채소와 곡물에 뿌려지는 회충알이 15조개나 된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였으니 ‘한국 안에 회충알이 없는 땅은 한 치도 없다’는 말이 나올법한 대목이다.

실제로 2011년 발굴된 조선 시대 사대문 안의 토양 시료에서는 기생충 알이 다량 확인됐다. 개천 바닥이나 골목 배수구뿐 아니라, 육조거리(현 세종로)나 종묘 광장 등 번화하고 개방된 곳까지 다수 관찰됐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토양에 다량의 기생충 감염 위험이 누적돼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1950년대를 지나며 한국전쟁의 경험, 위생 관념과 약품의 발달 등으로 한국인들은 점차 회충과 수치심을 연결짓기 시작했다. 회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가 ‘정상’으로 규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에서는 실제 배 속에서 위해를 가하는 회충을 본격적으로 목격하게 됐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을 때면 어김없이 회충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 온 뒤 웅덩이에 보이는 지렁이처럼 천천히 꿈틀대고 있었다”는 비유도 있었다고 이 논문은 소개했다.

당시 한국전쟁에 파견된 간호사 제네비에브 코너스는 “수술 시작 후 10분 이내에 7∼8마리 정도는 나왔다. 기생충들이 기어나올 때면, 그대로 집어 들어 양동이에 던져 넣고 수술을 계속했다”고 증언했다.

연구팀은 “기생충에 대해 외부에서 가해진 경멸은 회충 감염 사실을 당연한 것에서 수치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기존에 정상으로 여겨지던 상태를 ‘비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면서 “‘회충은 체내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공고한 개념을 무너뜨리는데 수치심의 시각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인에게 회충, 구충, 편충으로 대표되는 장내 기생충은 농업이 산업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1960년대까지 전 국민의 질병이었다. 때문에 기생충학자들은 한국을 ‘기생충 왕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3년 대중들에게 회충 감염에 따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63년 10월 9세 아동이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 응급실을 찾았는데, 복통 끝에 입으로 회충을 토해낸 것이다. 당시 수술로 장에서 제거한 회충은 총 1천63마리, 4㎏에 달했다. 회충 제거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아동은 회복하지 못하고 수술 후 9시간 만에 사망했다.

비슷한 시기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 사업이 기생충 감염 때문에 취소될 뻔한 사건도 기생충에 대한 사회적 충격을 더했다.

이후 1964년 기생충박멸협회가 설립되고 1966년 기생충질환예방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전국적인 기생충 박멸 사업이 시행되면서 장내 기생충 감염률은 빠르게 낮아졌다.

하지만 지금도 기생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부의 장내기생충감염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 기생충 감염률은 1971년 84%에서 1997년 2.4%로 낮아진 뒤 2004년 3.67%, 2013년 2.6%를 각각 기록했다. 전 국민으로 환산하면 아직도 100만명 넘게 기생충을 가진 셈이다.

다만, 기생충의 종류는 달라졌다. 회충과 요충 등의 선충은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민물고기 생식이 원인인 간흡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추세다.

이준행 삼성서울병원 내과 교수는 “기생충 감염을 과거의 질병으로 생각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생활양식의 변화로 과거에는 중요시하지 않던 기생충 감염은 되레 늘고 있다”면서 “기생충질환 예방을 위한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 교수는 “최근에는 대변 채취의 어려움 등으로 건강검진시 대변을 가져오지 않는 검진자들도 꽤 있는 편”이라며 “대변검사를 하면 기생충이 서식하는지를 확인하고 대장암 선별검사도 가능한 일석이조의 효과 있는 만큼 건강검진 때 대변을 채취해 검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기생충질환을 예방하려면 위생적인 생활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출 후, 식사 전에는 꼭 손을 씻고, 야채도 깨끗이 씻어 먹어야 한다. 특히 간흡충을 예방하려면 생선을 날고 먹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또 여행 때에는 사전에 예방약을 복용하는 게 좋다. 다만 건강한 식생활을 하는 사람이 구충제를 일부러 먹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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