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가 초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였다. 오기는 초나라 도(悼)왕을 도와 정치를 쇄신, 후진국이었던 초나라를 일약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오기를 총애하던 도왕이 급사하자 오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들이 오기를 제거하기로 했다. 귀족들이 보낸 병사들의 기습으로 살아날 길이 없다고 생각한 오기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를 죽인 무리에게 원수를 갚는 책략을 생각해 냈다.

병사들이 활을 쏘면서 자기 앞으로 몰려오자 도왕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침대 위의 시신을 덥석 껴안았다. 병사들이 오기를 향햐 쏜 화살이 오기의 등을 뚫고 도왕의 시체에 꽂혔다. 오기가 도왕의 시신을 껴안고 죽은 데는 두 가지 계략이 숨어 있었다. 하나는 당시 왕의 시신에 상처를 입힌 자는 수하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하게 돼 있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왕에 죽을 바에야 순사(殉死)로 보이게 해서 왕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 왕을 쏜 무리의 반역죄를 더 무겁게 하기 위한 심산이었다.

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숙왕은 선왕의 시체에 화실을 난사한 무리와 그들을 사주한 귀족들의 일족을 모두 참형에 처하고 오기의 넋을 기리는 대제를 올렸다. 오기는 자신이 죽더라도 숙왕의 칼을 빌려 자기의 원수를 갚게 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략을 썼던 것이다. 적이나 라이벌 방해자 등을 처치하는 일에 남의 칼을 빌려 제 3자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는 계략이 ‘차도살인계’다.

‘차도살인’의 사례는 역사에서 숱하게 나타난다. 삼국지에서 왕윤이 폭정을 일삼던 동탁을 여포의 창날을 빌려 제거한 것도 ‘차도살인’이었다. 사회주의 경제 실패로 궁지에 몰린 마오쩌둥이 국방장관 린바오와 4인방을 부추겨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둔갑시킨 후 류샤오치 등 반대파들을 제거한 것은 ‘차도살인’의 대표적 사례다.

정권의 충견으로 비판받아 온 검찰의 칼을 앞세운 적폐청산 칼바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복수전으로 비치고 있어 ‘오기의 차도살인’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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