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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누가 쓰면 시가 되는데 왜 내가 쓴 것은 시가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또 그 비슷한 취지로, “글쓰기에 왕도가 따로 있나요?”라고 틈만 나면 묻는 이도 있습니다. 그 물음에 “그냥 자기 방식대로 쓰면 되는 거지요”라고 대답하는 이도 있고요. 천학비재이긴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소설가로, 또 글쓰기 전문가로 자처해 온 입장에서 그분들의 답답한(?) 심정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다만, 말(馬)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싫다는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전제로 드리는 말씀이니 이 글을 읽으면 당장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옛말에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점은 “글공부 열심히 하라”입니다. 글공부 열심히 하면 저절로 아름답고 격조 높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글공부를 하면 내 몸 온 군데서 향기가 넘치고 내 말 구구절절에 기품이 서리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아마 요즘 사람들이 인문학(人文學)이라는 말을 애지중지하는 것과 거의 같은 취지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글공부, 인문학 공부를 할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오늘 글 제목으로 내 건 ‘문자벽서권귀(文字癖書卷鬼)’가 바로 그것입니다. 본디 글공부가 사람 되는 공부인데 사람 되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글이나 책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가리켜서 저는 그렇게 부릅니다. 문자향서권기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글자 병신, 책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글자와 책만 맹신하여 수신(修身)을 소홀히 하는 헛똑똑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둑을 배우기 전에 바둑책 50권을 읽고 비로소 반상(盤上)의 돌을 잡았다는 한 유명 인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책 귀신의 자격이 충분한 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야기의 취지는 그 장본인이 매사에 준비가 철저하고 목표로 삼은 과업 달성에 최선을 다하는 좋은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 됨됨이의 탁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니 제가 말하는 글자 병신, 책 귀신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와는 별개로, 제가 그 이야기를 들어 드리고 싶은 말은 ‘책 귀신’만으로는 어느 분야에서든 입신(入神)의 경지에 결코 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전해진 알파고 소식만 들어도 그런 이치를 쉬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보를 학습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실전 경험을 쌓은 신형 알파고가 구형 알파고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합니다. 기보를 학습한 이전 알파고들이 가지고 있던 문자벽서권귀의 일면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책 귀신이 되는 것만으로는 입신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또 한 번 증명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개 싸움의 기술이 그럴진대 사람 되는 공부인 글쓰기나 인문학이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길 없는 길’에 매진하는 몸공부(修身)가 선행되지 않고 섣부른 관념을 먼저 영입하면 절대로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전문가 중의 전문가, 입신의 경지는 애당초 난망일 것이고요. 이 세상의 모든 신(神)들이 항상 관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 되는 공부에서 문자벽서권귀가 절대 금물인 것은 ‘아는 것이 행위의 의무를 면제한다’라고 믿고 싶어 하는 우리 내부의 어떤 취약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문이든 종교든 예술이든 ‘아는 것이 죽을병이다’라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자기가 병신이고 귀신이라는 것을 모른 채 쓰는 것들은 모두 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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