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소장의 ‘학포찬 산수도’(왼쪽)와 새로 입수한 ‘학포찬 산수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16세기 전반기의 ‘학포찬 산수도(學圃讚山水圖)’ 1점을 구입했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1916년부터 소장하고 있는 다른 조선 전기의 학포찬 산수도와 작품 구성 및 양식, 장황 형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

△종이와 장황

기존 소장의 ‘학포찬 산수도’(이하 산수도1)와 새로 입수한 ‘학포찬 산수도’(이하 산수도2)의 크기는 거의 동일해 ‘산수도1’은 88.3×46.9cm, ‘산수도2’는 88.5×46.9cm이다.

과학적 분석결과, 두 작품의 종이 이 바탕은 같은 종류이다. 화면에 작은 금박이 드물게 보이는데, 금박의 개수도 적고 균일하지 않아서 초보적인 단계의 냉금지(冷金紙)이다. 화면에 모두 십자형의 조선식 병풍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원래 병풍 장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족자로 장황돼 있는데 장황의 전체 크기는 거의 동일해 ‘산수도1’은 181.0×51.5cm, ‘산수도2’는 181.4×52.5cm이다. 일본식 장황으로 꾸며졌으며 장황의 각 부분도 거의 동일한 크기이다. 다만 비단 문양과 색채가 다르고 ‘산수도2’의 경우에는 풍대(風帶)가 매달려 있으나 ‘산수도1’에는 풍대를 달았던 흔적이 없다.

△양식과 필치

최근 소장하게 된 ‘산수도2’와 기존의 ‘산수도1’을 비교한 결과, 동일한 종이 바탕에 화면 구성이 유사하고, 필묵법, 산수와 인물, 사물 묘사, 채색 감각 등 표현 방법이 동일해 16세기 전반에 동일한 화가가 두 작품을 거의 동시에 그린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두 작품에 시를 쓴 인물인 ‘학포(學圃)’의 필치가 동일하고 낙관도 같으며, 과학적 분석결과 인주의 성분도 동일해 한 사람이 찬시(讚詩)를 쓴 것으로 보인다. 글씨는 그림이 완성된 후에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학포에 대한 재검토

두 작품에는 ‘학포(學圃)’라는 호를 가진 인물의 시가 화면에 써 있고 ‘학포사(學圃寫)’즉, 학포가 썼다는 문장이 있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동일한 도장이 각각 날인돼 있는데 도장의 크기가 1.8×1.6cm로 똑같다. 이 도장은 특이한 각법으로 새겨져 있는데 ‘망치재장(罔齒齋藏)’으로 판독될 수 있다.

‘양팽손장(梁彭孫藏)’으로 읽을 수 없는 낙관 등을 고려할 때 ‘학포’의 정체를 새롭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 이전의 인물사전 수록 인물들 중에 ‘학포’의 호를 사용한 사람으로는 양팽손(梁彭孫·1488~1545), 이상좌(李上佐), 정훤(鄭暄·1588~1647), 서경창(徐慶昌·1758~)의 4명을 들 수 있다. 이중 서경창이 주목된다. 그는 승문원, 비변사, 규장각 등 중요 관서의 서리를 지냈고 천수경(千壽慶·1758~1818) 등과 교류한 위항문인이다. 서경창은 1813년께 ‘종저방(種藷方)’이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종저방’의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글씨와 학포의 찬시는 유사점이 있다. 향후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구입으로 두 작품이 동시에 제작되고 감상됐다는 점을 방증할 수 있게 돼 이들 작품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들 작품은 경물(景物)구성과 여백 배치, 농담 조절에 뛰어나고 필묵, 필치 구사력이 능숙해 16세기 전반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미 알려진 조선 전기 산수화에 더해 상호 긴밀한 연계성을 갖고 있는 산수화를 새롭게 입수하게 됨으로써 이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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