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절개 지켜낸 조선 반가 여인의 기품 고스란히

방초정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의 수호신 처럼 보인다.
방초정은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 마을에 있다. 조선시대의 관영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 있던 곳인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인 1519년( 중종3)으로 추정된다. 연안이씨 부사공파 일가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이래 세거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연안이씨는 이무가 시조다. 무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복할 때 나당 연합군 사령관을 맡았던 소정방의 부장으로 왔다가 신라에 귀화했다. 무열왕은 중국 노자의 후손인 그를 연안후로 봉하고 식읍을 내렸다. 연안이씨는 그렇게 이땅에 뿌리를 내렸다.

방초정은 마을 입구에 성문처럼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수호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1백여군데의 누정을 둘러보았지만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누각처럼 생긴 정자가 마을의 입구에 서 있는 이유는 이 마을이 연안이씨의 세거지라는데서 설명할 수 있겠다. 마을 공동체의 공공공간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의 대소사를 논하는 마을 회관 노릇도 하고 문중 자식들을 가르치는 학교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방초정은 당나라시인 최호의 싯구에서 따왔다
방초정과 최씨담
방초정을 처음에 지은 이는 부호군을 지낸 방초(芳草)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이다. 1625년에 지었다. 1689년에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1737년 홍수로 누정이 유실됐다. 1788년 5대후손인 이의조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원래는 감천 가까이에 있었으나 수해를 피해 마을쪽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이정복이 세운 정자와 최씨담에는 조선의 쓰라린 역사와 연안이씨 집안의 슬픈 가족사가 담겨 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구로다가 이끄는 제3번대와 모리와 시마즈가 인솔하는 제4번대가 성주 지례 개령 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향했다. 그때 이정복은 원터에 있었다. 1년 전 하로마을의 화순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던 그는 처가에서 혼자 본가로 돌아와 있었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영이 있는 능지산 아래 피신했다. 친정인 하로 마을에 남아 있던 부인 최씨는 왜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죽어도 시집에서 죽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향했다. 40여리 산길을 걸어 도착했으나 시댁 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없었다. 시댁식구들이 있는 능지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왜구들과 마주쳤다. 최씨는 왜구에게 겁탈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겠다며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최씨를 따르던 여종 석이도 뒤따라 자결했다. 최씨의 나이 17세였다.사람들이 이 웅덩이를 최씨담이라 불렀다. 이정복은 부인이 자결한 웅덩이를 확장해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의 호를 따 방초정을 세웠다.
화순최씨 정려각과 여종 석이의 비석
‘방초’는 전고의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 704~705)의 시 ‘등황학루’에서 따왔다.‘꽃다운 풀은 무성히 앵무주에 우거졌네. 芳草 鸚鵡洲’ 싯구다.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더불어 중국 강남 3대 누각의 하나이다. ‘앵무주’는 양자강 한복판의 모래톱으로 된 삼각주이다. 후한 말년 강하 태수였던 문인 예형이 황조에게 살해되어 묻힌 곳인데, 예형의 글 ‘앵무부’를 따서 이름했다. 빼어난 절경지인데다 예형의 고사까지 있는 곳이어서 무수한 시인들이 시를 남겼다. 이백도 ‘앵무주를 바라보고 예형을 생각하며’라는 시를 남겼다.최호도 이백도 황학루에서 앵무주를 바라보며 예형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방초’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 봄풍경을 읊는 대목에도 나온다 ‘ 푸르게 우거진 나무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을 때, 綠陰芳草勝花時’이다. 정자의 주인 이정복에게 방초는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다. 음력 4월14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했으므로 일본군이 김천까지 쳐들어와 부인이 자결할 때는 양력으로 5월말이나 6월초 였을 것이다. 그때가 딱 ‘녹음방초승화시’였던 것이다.꽃다 지고 나무들이 새 잎을 달고 싱그러운 기운을 한껏 내 뿜을 때 이정복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했던 것이다. ‘방초’는 절개를 지킨 부인의 향기이고 ‘앵무주’는 부인이 몸을 던진 최씨담이 아닐까. 이백과 최호가 황학루에서 앵무주를 내려보며 예형의 죽음을 애도했듯이 이정복도 방초정에서 최씨담을 보며 부인의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다.

1632년(인조10)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문은 1764년 세웠으며 현재의 여각은 1812년에 증축했다. 정려각내에 있는 ‘절부부호군 이정복 처 증숙부인 화순최시 지려(節婦副護軍李廷馥妻贈淑夫人和順崔氏之閭’라는 정려문은 인조의 친필이다. 정려각 앞에는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는 비석이 있다.최씨 부인과 함께 자결한 여종 석이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연안이씨 후손들이 여종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작했으나 종의 비석을 절부의 정려각 앞에 세울 수 없어 최씨담에 던져 넣었다가 1975년 최씨담 준설공사 중 발견돼 현재의 자리에 옮겨졌다.
최씨담에 있는 수백년 된 버드나무
정자 앞 최씨담에는 수백년된 버들나무 물가에 발을 깊이 드리우고 있고 꽃떨구고 뼈만 앙상한 배롱나무가 스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회화나무, 젓나무, 밤나무와 불두화, 사철나무, 무궁화, 작약, 원추리, 국화, 창포도 세한에 몸을 낮추고 있다.

최씨담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우리나라 연못 안에 섬은 대개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두거나 대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나타내는 한 개의 섬을 조성하는 방지원도형이다. 두 개의 섬을 조성한 방지쌍도형은 드물게 보이는 형태다. 해와달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최씨와 석이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었다고도 한다.

방초정은 2층 누각의 팔각지붕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2층에 세짝의 들문을 달아 들어서 올리면 마루가 되고 내려서 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게 했다. 겨울에도 지낼 수 있게 온돌을 넣었다. 정자의 아래층은 자연미를 살린 통나무 기둥에 2층 온돌방의 불을 지피는 아궁이, 굴뚝의 기능을 하는 호박돌을 붙인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가늘고 둥근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치고 있다.
두개의 섬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최씨 부인과 여종 석이를 위해 조성했다는 설이 있다.
정자안에는 방초정과 일대의 가경을 노래한 제영시 38편이 걸려있다.우암 송시열의 9세손인 송병선의 시와 이만영의 ‘방초정 10경’이 눈길을 끈다. 이만영의 방초정 10경은 방초정을 시점으로 하는 집경시로 당시 방초정 일대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정자 안 사방 귀퉁이에 주련 형태로 걸려 있다. 1경 ‘일대남호一帶鑑湖’는 난간 밖 감호일대의 물가풍경과 봄기운속의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2경 ‘십리장정十里長亭’은 우뚝 솟아 여행길의 이정표 역할 정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경 ‘금오조운金烏朝雲’에서는 금오산 아래 구름이 깔릴 때 선경이 그려져 있고 4경 ‘수도모설修道暮雪’은 인근 수도산의 해저무는 설산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5경 나담어화 ‘螺潭漁火’은 연못에 불 밝히고 고기잡는 풍경이다. 6경 ‘우평목저牛坪牧笛’는 들판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를 정자에서 들으며 읊는 노래다 ‘7경 굴대단풍窟臺丹楓’은 굴대 주변의 붉은 단풍의 아름다움을, 8경 ‘송봉취림松岑翠林’은 푸른 송산의 수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9경 ‘응봉낙조鷹峰落照’는 응봉 아래의 해떨어지는풍경이다. 10경 ‘미산반륜 眉山半輪’은 미산 위에 뜬 반달을 노래했다.
김동완.jpg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빈들녘 가을 누정에 푸르스름한 달빛

나는 산뜻한 안개 속에서 옛사람을 그리네

노성과 버들의 땅은 또한 울퉁불퉁하고

한 경치 시로 묻나니 방초의 봄일세

- 송병선의 시 ‘한방초정판상운’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