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벗 삼아 ‘학’ 자식삼아 자연과 하나되어 유유자적
1533년(조선시대 중종 28년)에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1-1575 이후)가 조부의 뜻에 따라 정자를 지었다. 정자 앞마당에는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리며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매학정에서 술과 그림을 그리며 은둔의 삶을 살았다. 정자 뒤의 언덕을 고산이라 부르고 정자를 매학정 이라 이름하여 그의 호를 고산과 매학정으로 삼았다. 중국 서호 고산에서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운 북송의 은둔시인 임포의 삶을 동경해서 지었다. 임포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매화와 학을 길렀다. ‘매화는 아내요 학은 자식’이라며 평생을 은둔했다. 매학정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허가 됐으나 1654년(효종 5년)에 다시 지었고1862년(철종 13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됐다가 1970년에도 크게 보수를 했다.
점획을 과감하게 생략한 감필법(減筆法), 획간의 공간을 좁거나 짧게 처리한 속도감 있는 운필, 중록으로 쓴 맑고 깨끗한 선질은 장필의 초서풍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들이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16ㆍ17세기에 걸쳐 폭넓게 유행했다. 16세기에 그의 초서풍을 따른 대표적 서예가는 이우이다. 이이의 동생이며 황기로의 사위였던 그는 황기로에게서 매학정을 포함한 모든 유품을 물려받았다. 황기로의 글씨를 직접 전수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밖에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오운 서일 황기로가 주로 활동했던 안동을 포함한 인근 지역에서 그의 서풍을 계승한 대표적 서예가이다.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경렴정’ 현판을 쓸 때의 일화가 있다. 황기로는 스승 이황으로부터 경렴정 현판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이황 자신은 해서로, 황기로는 초서로 글씨를 써서 걸어두겠다는 것이다. 스승이 지켜보는 앞에서 손이 떨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를 눈치 챈 이황이 자리를 비켜주자 일필휘지로 현판 글씨를 써나갔다.
황기로는 이이와 사돈을 맺었다. 이이의 동생 이우와 황기로의 딸이 혼인을 맺었던 것이다. 여기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558년, 23살의 이이는 당시 성주목사이던 노경린의 딸과 결혼한 뒤 6개월 동안 처가에서 살았다. 6개월이 지나자 그는 강릉에 있는 외할머니를 보러가게 됐다. 가는 길에 이황을 만나 가르침을 얻을 작정이다. 이에 앞서 구미에 있는 황기로를 만나러 매학정으로 갔다. 이이의 천재성을 알아본 황기로는 이이를 붙잡고 밤 늦도록 술을 마셨다. 황기로는 이이의 동생 이우와 자기의 딸을 혼인을 시키고 싶다는 뜻을 비치고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이는 매학정에서 하룻밤 자면서 황기로와 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 소회를 긴 시로 적었다.
산에 오르기 몇 번이며 물은 몇 번 건넜던가
외로운 산은 넓은 들 앞에 맞대어 있고
낙동강 뿌연 연기는 온 물가에 둘러 있네.
덤불 헤치고 길을 찾아 대 사립문을 두드리니
동자가 문에 나와 날 반가이 맞아주네
으리으리한 붉은 누각 먼지 한 점 없어
간소하면서 누추하지 않고 화사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네.
빈 뜰에 매화송이는 아직 피지 않았는데
깊은 못의 학 울음소리가 가끔 귀에 들려오네.
(중략)
맹세코 고기잡고 나무하며 한평생 늙을지언정,
흐리멍텅하게 취생몽사는 하고 싶지 않네.
오늘 밤 술잔을 사양치 않음은
인간만사 털어버리길 여기에서 시작하려고.
- 이이의 시 ‘매학정을 방문하다’.
정자 안에는 이이의 매학정기문과 시판, 이황과 임억령 조임도 등의 시들이 걸려 있다.송순 은 1552년 선산부사로 부임해 왔는데 이곳에 들러 시를 남겼다. 이종하가 매학정 건립과정을 설명한 실기를 쓰고 정두경이 매학정병서, 남운경이 매학정서를 썼다. 황필은 매학정 원운시를 썼는데 황기로가 조부의 시를 차운했고 이황도 제자를 위해 황필의 시를 차운해 시를 남겼다.
백세전 임포의 풍류를 사모하여
평생토록 호반에서 매화와 학을 벗하였네
매화향기 이로부터 깨끗한 기운 함께 하고
눈처럼 날리는 꽃잎 오는 봄을 사양하네
그대가 아름다운 이름 사모하여 좋은 땅 차지 했으니
나는 빼어난 경치 구경하려 배를 띄운다오
학아, 매화꽃이 야위어 간다고 애태우지 말라
장욱의 필치로 앞으로의 세상 즐기게 해 주리라
- 이황의 시, ‘매학정차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