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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일출을 접하며 경건한 염으로 받았던 올해의 시간도 저문다. 어디 삶이 힘들지 않은 적이 있었으랴.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자가 쏟아지는 이맘땐 추풍낙엽을 보듯 감회가 쓸쓸하다. 인생 2막의 기대여명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60세인 남성은 23년, 여성은 27년을 더 산다고 예상됐다.

퇴직을 앞둔 지인에게 즐겨하는 조언이 있다. 가급적 공원과 도서관 가까이 자택을 구하라는 권유다. 경험상 거주지 인근에 도보로 가능한 공공시설이 있으면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산책과 독서로 노후가 유익해서다. 게다가 나지막한 산을 끼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런 삼박자를 갖춘 우리 아파트는 주관적 행복감이 크다.

도서관은 나의 소중한 루틴의 하나다. 매주 서너 차례는 반드시 가는 날로 정했다. 좋은 글은 독서력이 뒷받침될 때 나오는 법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난달 포항 지진도 도서관에서 겪었다.

길공원을 걸어서 하얀 모비딕 같은 건물에 좌정한다. 평소 읽던 세계사를 펼치고 집중을 위한 심호흡을 토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바로 그때였다. 뿌지직 굉음과 함께 벽체가 흔들렸고, 뒤편의 서가가 요동치면서 진열된 책들이 넘어졌다. 재빨리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위대한(?) 본능의 힘이었다.

기상청의 긴급 통보가 휴대폰에 울리면서 긴박감을 자아냈다. 잔뜩 웅크린 채 요동치는 선반과 흘러내리는 서적을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여성을 불러들였다. 경황 중에 어쩔 줄 모르고 피할 생각을 못한 듯하다. 십여 초나 됐을까. 창졸간에 책들이 널브러져 엉망이 됐고 바깥으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재난 특히 지진의 체감 정도는 그 당시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지난번 경주 지진 시는 야외서 조깅을 했었다. 솔직히 전혀 몰랐다. 밖으로 몰려나온 주민들이 웅성거리는 광경을 보고서야 알았다. 근데 이번 포항 지진은 도서관 5층의 열람실에 있다가 제대로 체험을 하였다. 눈앞의 생생한 목도였다.

참고로 지진과 관련하여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 다름 아닌 ‘규모와 진도의 차이점’이다. 기상청이 발신한 문자를 보면 ‘포항 북쪽 6㎞ 지역 규모 5.4 지진 발생’이라 돼 있다. 여기서 규모는 ‘지진 근원지의 절대적인 힘’을 의미한다. ‘어떤 지점까지 전해진 상대적인 힘’은 진도이다. 당연히 규모는 진도보다 크다. 물론 진앙지 근처라면 두 개념이 비슷할 수도 있겠다.

검도가 특기인 친한 후배의 얘기다. 학창 시절 유단자가 된 이후 직장 일이 바빠 운동을 못 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이 흐른 무렵 만난 핵심 고객이 검도 마니아였다. 유대를 위해 다시 죽도를 잡게 됐는데 스스로도 놀라웠단다. 대전 수련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반응하면서 공격과 수비의 기술이 자신도 모르게 이뤄졌다고. 신체로 습득한 기억은 오래 간다는 사실에 적잖이 공감했다.

위험 상황이 닥치면 논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어쩌면 직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데 현대인은 본능의 상당 부분을 지능에 양도한 상태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기제가 반복 학습이다. 몸이 암기할 때까지 훈련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동해안을 강타한 천재의 급박했던 공포도 서서히 잊히리라 믿는다. 고대 이스라엘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겼다는 ‘이것 역시 지나가리라’처럼 말이다. 그래도 위기 대응의 행동 지침만은 두뇌가 아닌 육체로 체득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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