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그것은 실재(實在)하며 무게가 있다. 놓으면 그냥 땅에 떨어진다. 실재하는 물건은 또한 특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가 켜던 바이올린, 제임스 조이스가 쓰던 펜, 부처가 베고 누웠던 목침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새긴 감성적 가치를 수반하기에 동시대의 같은 물건보다 더 소중히 여겨진다. ‘진품, 명품’의 개념은 물질적인 수준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무형의 에테르 같은 것이다.
전통적으로, 어떤 물건이 신화적 가치를 지니려면 역사나 혈통에 연계되어야만 했다. 한 줌의 빵이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성화 되는 일은 여느 개인의 거실에서 (원한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칼이나 부활절 달걀, 또는 미국 헌법 원본이 한 개인이나 제도로부터 다른 사람이나 제도로 전승되는 까닭은, 모두가 제 목숨처럼 간절히 원했거나, 의례(儀禮)를 통해야 했거나, 아니면 유명한 경매장에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거나, 그 가치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충실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러시코프, ‘카오스의 아이들’ 중에서’
언제가, 우리 시대에 와서 공간 개념이 바뀌면서 ‘이웃’의 의미와 가치도 많이 바뀌어 간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네 이웃에게 잘하는 것이 곧 인류 전체에 대한 기여고 공헌이라는 취지였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타자’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행복한 것으로 안내하는 첩경이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스마트 세상은 보고 생각하는 것보다 만지고 느끼는 새로운 존재 양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상품이든 인간관계든 만질 수 없는 것은 이제 2류나 3류로 전락합니다. ‘만지는 것’에도 등급이 매겨지고 ‘터치’의 질감까지 차별화되는 것이 요즘 현실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 향기롭고 부드러운, 만질 것 많은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아무래도 직무유기인 것 같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나를 기다리는 저 숱한 만질 것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보심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