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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나이 들수록 즐거움이 감소합니다. 특히 감각적 쾌락이 젊을 때보다 많이 떨어집니다. 웃을 일도 그만큼 줄어듭니다. 저 같으면 직업적인 의무감이 없다면 아마 하루 종일 한 번도 웃지 않을 때도 왕왕 있을 겁니다. 그만큼 외로울 때도 많습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는 옛말이나 ‘TV, 영화, 책을 보면서 혼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시중의 말이 절로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감각에 충실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각적인 것, 청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에 충실하려고 애를 씁니다. 영화나 TV를 볼 때도 사건 전개나 인물의 대사보다는 장면의 아름다움에 더 집중하고, 젊어서 듣던 노래나 잘 알려진 클래식 곡들을 듣는 시간을 매일매일 고정 배치해 두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장 나서 구석에 처박혀 있던 DVD 플레이어도 수리해서 침실에서 재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콤보’ 제품인데 옛날 비디오테이프도 재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고 듣던 가내(家內) 엔터테인먼트 패턴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촉각에도 신경을 씁니다. 전에는 그저 무심히 만지던 것들도 요즘은 가급적 느끼면서 만지려고 노력합니다. 촉수(觸手)의 축복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전했을까라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많이 합니다. 컴퓨터 자판이나 볼펜이 제 감촉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가장 먼저 교체되었습니다. 휴대폰을 바꿀 때도 ‘만지는 감(感)’을 가장 우선에 두고 골랐습니다. 지갑을 살 때도 겉 재질의 느낌과 손안에 드는 느낌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취미생활의 도구를 장만할 때도 그 원칙을 적용합니다. 전에는 포장지도 뜯지 않고 가격만 보고 사던 것을 이제는 뜯어서 실물을 만져보고 선택합니다.

우리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그것은 실재(實在)하며 무게가 있다. 놓으면 그냥 땅에 떨어진다. 실재하는 물건은 또한 특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가 켜던 바이올린, 제임스 조이스가 쓰던 펜, 부처가 베고 누웠던 목침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새긴 감성적 가치를 수반하기에 동시대의 같은 물건보다 더 소중히 여겨진다. ‘진품, 명품’의 개념은 물질적인 수준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무형의 에테르 같은 것이다.

전통적으로, 어떤 물건이 신화적 가치를 지니려면 역사나 혈통에 연계되어야만 했다. 한 줌의 빵이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성화 되는 일은 여느 개인의 거실에서 (원한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칼이나 부활절 달걀, 또는 미국 헌법 원본이 한 개인이나 제도로부터 다른 사람이나 제도로 전승되는 까닭은, 모두가 제 목숨처럼 간절히 원했거나, 의례(儀禮)를 통해야 했거나, 아니면 유명한 경매장에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거나, 그 가치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충실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러시코프, ‘카오스의 아이들’ 중에서’

언제가, 우리 시대에 와서 공간 개념이 바뀌면서 ‘이웃’의 의미와 가치도 많이 바뀌어 간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네 이웃에게 잘하는 것이 곧 인류 전체에 대한 기여고 공헌이라는 취지였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타자’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행복한 것으로 안내하는 첩경이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스마트 세상은 보고 생각하는 것보다 만지고 느끼는 새로운 존재 양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상품이든 인간관계든 만질 수 없는 것은 이제 2류나 3류로 전락합니다. ‘만지는 것’에도 등급이 매겨지고 ‘터치’의 질감까지 차별화되는 것이 요즘 현실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 향기롭고 부드러운, 만질 것 많은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아무래도 직무유기인 것 같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나를 기다리는 저 숱한 만질 것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보심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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