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국 새경북포럼 경산지역위원(문학박사·구비문학전공)
근래 와서 성찰(省察)이란 용어는 자의든 타의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언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사전적 의미로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여 살피는 것’이란 어원 해석에는 누구나 친근하지 못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작금에 와서 사회 일각에서 너무나 쉽게 원용되고 있는 정치언어란 데 있다.

이외에도 이에 종속된 상생(相生)이니, 대승(大乘)이니, 또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니, 결자해지(結者解之)니 하는 종잡을 수 없는 표현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알게 모르게 정치권에 유행어로 도식화(塗飾化)되고 있음 또한 긍정적이든 부정적 측면에서든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반대급부의 언어적 폭력이라는 지적이다.

필자는 국문학 전공자로서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이에 대한 분명한 해법과 상용화된 도덕적 언어에 대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가 없지 않았으나, 결론은 당사자의 자기 성찰이 먼저란 해법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는 유훈(遺訓) 한마디가 후대에 계(戒)가 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이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임란(壬亂) 창의(倡義) 의사(義士)들의 유훈은 하나같이 그들의 울부짖음이요, 나라를 구하지 못하였다는 안타까움의 절규란 점이다.

지난날 우리 역사가 겪어야 했던 임진년 왜란(倭亂)은 갈팡질팡하였던 조선왕조의 무능과 붕당(朋黨)의 폐해가 일촉즉발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였지만, 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말보다 ‘나의 나라’, ‘나의 조국’이란 대명제 하나로 백 마디 말보다 더 소중한 자신들의 목숨을 조국의 이름 앞에 내놓았던 사람의 이름은 의사(義士)이다. 그들 창의 실기에 꼼꼼히 써내려간 그들의 피눈물 속에는 하나같이 적의 빗발치는 조총의 탄환도, 중과부적의 적진 속에서도 죽창 하나 높이 들고 ‘내 나라를 내 놓아라’ 아우성쳤던 울부짖음이 누구를 위한 상생이고 성찰이었던가.

이를 필자가 연구 중인 경산지역의 사례로 보면, 도망간 현령 대신 경산대장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빼앗긴 영천성 복성을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들다 얼굴에 적이 쏜 세대의 화살을 맞고도 “우리 땅을 내놔라!” 소리쳤던 그의 함성은 30세를 넘기지 못한 패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가 남긴 유훈은 ‘조국을 더 이상 지켜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다’탄하였고 자인현·최문병의병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군량미로 내놓고, 현의 경계지역을 온몸으로 막아내니 감히 왜적이 자인현 경계를 넘지 못했다 한다. 명월산성에 웅거한 박응성 의병장 또한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성주전투에 출정하여 부자가 함께 산화(散華)하였다는 기록 등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살신성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폐해(弊害) 또한 없지 않다. 당시 면천(免賤)과 신분상승이란 대명제 앞에 출정하는 관군과 의병들을 모두 참살(慘殺)하고 대신 자신은 승차(陞差)하였다는 징비록(懲毖錄)에 남아 있는 기록과 물밀듯 들이닥친 왜구 앞에 경산향교 노복이 오성위패와 제례복을 몰래 산중 굴속에 옮겨 병화를 피할 수 있었다는 논공(論功)이 면천 기회가 되었으나, 도리어 당당히 의병으로 죽기를 맹서하였다는 화왕산 회맹록에 남겨진 기록은 무엇이 진정이고 상생인가를 가늠하는 예이다. 또 조정이 내린 논공행상도 스스로 사양하고 초야 묻혀 후학양성만을 고집하였던 면와(勉窩) 황경림 의병장의 명예와 의무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의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진정성에도 그 흔한 ‘위령탑’,‘임란창의의 날’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이 시대 지식인 또한 정치적 언어에만 급급해 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르나 하는 생각만은 여전히 트라우마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