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일의 삶 즐기던 주인은 간데없고 선경만 덩그라니
일이 있으면 돕기를 잊지 말고
심각한 일에 임해서는 더욱 싸워 이기며
깨닫고 깨달아 모름지기 밝히고 관통하여
중국 경정산 서암승 같이 되지는 말 일이다.
-정영방의 시 ‘경정’
정영방은 퇴계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에게서 수학했다. 23살이 되던 해에 책 상자를 지고 정경세가 있는 우곡 산중으로 찾아가 제자가 됐다. 대학 중용 심경 등을 공부하며 이치를 깊이 깨달아 일가를 이뤘다. 공부에 전념하는 그에게 정경세는 “그대에게 시험삼아 묻노니 꽃과 버들 중 무엇이 더 푸른 것을 푸르게 하고 붉을 것을 붉게 하는가”라는 시를 지어줬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가벼움과 무거움, 앞선 것과 뒤 따르는 것, 출처에 경계가 있음을 가르쳤다. 정영방은 이황- 유성룡-정경세-정영방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의 삼전(三傳)의 제자로 꼽힌다.
깊은 산의 내면까지는 알수 없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과 산이 있네
홍진 세상과 헤어짐은 스스로 원했지만
조물주는 한쪽만 위해 만들었네
산봉우리는 둥글어 상투같고
흐르는 물은 굽이쳐 만을 이루었네
정공이 자리잡아 손님을 맞이 하는 땅
잇따라 오는 비로 오래 머무르다 돌아가네
- 약봉 서성의 시 ‘서석지’
정영방은 석계 이시명과도 교유가 깊었다.이시명은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 석계초당(石溪草堂)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의 남편이다. 그가 쓴 ‘봉기석문지당병서(奉奇石門池堂幷序)‘는 당시의 서석지와 경정의 풍광과 정영방의 생활의 일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못 가운데 겹겹이 뒤섞여 늘어선 돌들은 짐승이 엎드리고 용이 서린 것 같은데, 큰 것은 여러 사람이 앉을 정도고, 작은 것은 오히려 나란히 걸터앉을 수 있다. (중략) 못의 서쪽에 작은 집을 만들어 도서와 바둑판, 거문고, 술단지와 책상과 지팡이를 두고는 우리 어른께서 아침저녁으로 굽어보시며 즐거워하신다. 그 북쪽에다 또 몇 칸의 초가집을 짓고 어른과 아이들이 거처하며 책을 보게 하셨다. 못에 새로 연꽃을 심어 활짝 피었고 물고기도 몇 마리 길렀다. 못 주변에는 넉넉하게 깨끗한 모래를 뿌리고 잔디를 두터이 심어 깔고 앉을 수 있게 하였다. 구기자, 국화, 복숭아나무, 버드나무와 많은 소나무를 곳곳에 심어서 못을 보다가 그 안에 들어가면 놀라서 우러러보며, 그것이 저절로 그리된 것인지 인위적인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