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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그렇게 딱 맞는 예시를 어떻게 찾아내세요?” 제가 쓰는 글을 두고 한 번씩 듣는 질문인데 얼마 전에 집 아이에게서 또 들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도 바쁠 텐데 늙은 애비가 심심풀이로 쓰는 글까지 읽어주는 모양입니다.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지만 늘상 그렇듯이 원하는 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현실에서든 책에서든, 예시를 찾아내려는 시도나 노력을 따로 기울여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연상(聯想)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건(소재)과 해석(주제) 사이의 주고받는 대화라고나 할까요? 재미있고 인상적인 사건(독서 포함)을 만나면 그것이 저의 간절한 해석 욕구를 자극합니다.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무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간절해지면 이것저것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건이나 사고(事故, 思考)들이 자발적으로 현신(現身)합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글감과 주장이 서로를 불러냅니다. 오고 가는 백과전서식 조회(照會) 작용이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한 편의 글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만난 사건, 사고는 신약성서의 한 구절입니다. 유명한 ‘착한 목자의 비유’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태오복음,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중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오는 ‘착한 목자’는 신약성서의 비유 말씀 중에서도 문학적인 시퀀스가 특히 두드러진 것에 속합니다. 구세주의 절대적인 인간 사랑을 강조한 표현이지만 그와 함께 우리네 ‘계산에 살고 죽는 속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아등바등 살면서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한 마리의 양’들이 우리의 죄책감을 부추깁니다. 심금(心琴)에 큰 파열음을 냅니다. 앞으로는 그런 ‘하나를 버리고 아흔아홉을 취하는’ 영악한 세속적 삶을 살지 않아야겠다는 각성이 들게 합니다. 이런 ‘공명의 효과’는 모든 문학적 표현이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의 비유가 한 사람의 인생을 한꺼번에 뒤집어내는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틀림없이 이의를 제기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착한 목자의 비유’는 신(구세주)의 절대적인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며, 인간 피조물들은 그 ‘신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고 답습해야 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인데 괜히 오버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착한 목자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 방식입니다. 사랑을 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야기를 굳이 제 삶의 죄책감에 연결시켰습니다. 그동안의 영악했던 세속인생을 반성하는 거울 텍스트로 사용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분명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도 구원자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제가 받은 텍스트의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구원을 구걸하는 곳이 아닙니다. 구원자를 닮고, 스스로 구원자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곳입니다. 그것이 이번 제 글쓰기의 조회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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